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요한61-예수와 베드로의 차이 (요한복음18:1-11)

새벽지기1 2017. 4. 10. 07:39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예수님의 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번째 표적을 행할 때 예수님은 “자기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요2:4)고 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문제를 놓고 동생들과 대화할 때에도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않겠다”(요7:6,8)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12:23)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 때를 위하여 왔나이다.”(12:27)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세족식을 행할 때에도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요12:1,3)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항상 ‘자기의 때’를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할 때부터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행할 때까지 ‘자기의 때’를 의식하고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때를 향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의 때를 의식하며 그 때를 향해 살았을까요? 그 때가 어느 때이기에 그 때를 향해 살았을까요? 그 때는 놀랍게도 십자가에 죽는 고난의 때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때였습니다(눅9:22). 그러나 동시에 그 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결정적인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고 승리하는 종말론적인 승리의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화로움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때, 세상일들이 반복되는 크로노스(Chronos)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카이로스(Kairos)의 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둡게만 인식합니다. 고난으로만 인식합니다. 인간의 무지와 잔악함이 무겁게 내리누른 비극적 죽음으로만 인식합니다. 미국의 영화감독 멜 깁슨이 제작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육체적인 고난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고난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심히 부족한 인식입니다. 사건의 겉모습만 보았지 속은 보지 못한 피상적인 인식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희생과 고난의 죽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희생과 고난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찬란한 영광과 승리로 가득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역설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희생과 고난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영광과 승리의 죽음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수난이라는 측면보다는 영광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합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는데 요한복음은 수난보다도 영광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함이자 영적인 깊이이고, 기독교의 독특함이자 영적인 깊이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깊이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 깊이에까지 나아가야 진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자기의 때’를 의식하고 살피며 살았습니다. ‘자기의 때’를 향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기의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자기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도 하고, 마지막 기도도 올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 기슭의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동산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마다 제자들과 함께 가끔 갔던 곳이라서 가롯 유다도 잘 아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수님과 유다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기서 재회했습니다. 마귀에게 이끌려 예수님 곁을 떠났던 유다가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밑에서 일하는 성전 경비병들과 로마의 병사들 - 횃불과 무기를 가진 병사들을 데리고, 즉 예루살렘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 연합군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무장을 하고 나타난 유다 일행을 보면서 사람들 하는 짓이 참 슬프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그랬을 겁니다. 유다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저들을 맞이했습니다. 저들이 자기를 체포하러 왔다는 것을 아셨지만, 자기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를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털끝만큼의 두려움이나 적개심 없이 바람을 맞이하듯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다.”(에고 에이미)

‘에고 에이미’ 이 어법은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낼 때 사용하는 고유한 어법인데 예수님이 지금 그 어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 위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내가 그다’라고 말하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기를 가진 병사들이 물러나면서 땅에 엎드러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v.6). 여러분, 이 일이 이해됩니까? 예수님을 체포하러 무기를 들고 나타난 자들이 예수님 말씀 한 미디에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렸다는 게 이해됩니까? 아마 잘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런 일은 하나님의 존재의 위엄에 압도당한 자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신비한 꿈을 꾸고 그 꿈으로 인해 번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 다니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꿈을 해석해주는 사건이 나오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듣고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한 일이 있었습니다(단2:46). 다니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위엄에 압도당해 엎드린 겁니다.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 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을 때에도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눅5:8). 요한도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는 인자 같은 이를 보았을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계2:17).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압도당해 그런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뒤로 물러나 엎드러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에 압도되어 엎드러진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다시 물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그들이 또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소.”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전과 똑같이 ‘내가 그다’라고 대답하고는 “너희가 찾는 사람이 나라면 이 사람들은 가게 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유다 일행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두 번 물었는데 왜 이렇게 반복해서 물었을까요? 저들이 누구를 찾는지를 몰라서 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으러 왔다는 것도 알았고, 자기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도 다 알았습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두 번씩이나 똑같은 물음을 던진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물어야 저들이 찾는 자가 오직 예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저들이 찾는 자가 오직 예수라는 것을 확인해야 제자들까지 체포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겠으니까, ‘나는 체포하되 이 사람들은 가게 해주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겠으니까 그런 겁니다. 요한도 그렇게 해설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v.9) 옳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채포하러 온 유다 일행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두 번씩 묻고, ‘내가 그’라고 거듭 말한 것은 순전히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여러 차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마지막 기도에서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실제로 행했습니다. 멸망의 자식인 가롯 유다 외에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다 지켜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체포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 신변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제자들 지키는 일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돌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칼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칼을 빼더니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린 겁니다. 목을 베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귀를 베어버리는 돌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태는 일종의 항거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에 대한 항거,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거의 몸짓으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벤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행위는 정말 정당하고 영웅적인 항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웅적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나무라시며 “너는 내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마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느냐?”(v.11)고 꾸짖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가 현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였는데 베드로는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권력과 로마 권력의 연합 세력에 힘으로 항거하지 않았는데 베드로는 힘으로 항거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림으로써 영웅적인 항거의 의사를 표출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구원 역사가 예루살렘 권력과 로마 권력에 의해 짓밟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항거의 몸부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운동을 힘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매우 정의롭고 용감하고 결단력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순순히 체포당하여 끌려가는 예수님보다는 베드로의 행위가 훨씬 피부에 와 닿고 영웅적인 지도자의 모습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예수님보다는 베드로의 행위가 훨씬 정의로워 보이고, 용감해 보이고, 결단력 있어 보이고, 영웅적인 지도자의 모습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사탄의 행위라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베드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의 힘으로, 무기의 힘으로, 권세의 힘으로, 사람 숫자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짓밟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광과 승리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놀랍게도 십자가에 죽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에 짓밟히는 방식, 수치와 패배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약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런 것들을 싫어합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을 싫어하고, 세상 권세에 짓밟히는 것을 싫어하고, 수치와 패배를 싫어하고, 약함을 싫어합니다. 대신에 돈을 좋아하고, 힘과 권세를 좋아하고, 영광과 승리를 좋아하고, 강함을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이루려 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돈, 힘, 권세, 영광, 승리, 강함, 이런 것들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하고 채우려 해요. 그런 것들로는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거나 채워지지 않는데도 자기들이 좋아하니까 그런 것들로 이루게 해달라고, 채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큰돈을 주셔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쓰게 하소서. 하나님, 나에게 높은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게 하소서. 하나님, 나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세상의 고지를 점령하게 하소서. 멋지게 승리하게 하소서.’라고 애걸복걸합니다.

 

착각입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베드로적인 방식, 고지를 점령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적인 방식을 거부했어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칼을 뽑습니다. 돈의 칼, 힘의 칼, 권세의 칼, 영광의 칼, 승리의 칼, 강함의 칼, 분노의 칼을 빼어 휘두릅니다. 이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멋들어지니까 베드로적인 것들을 좋아하고, 베드로적인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겠다고 애를 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고지를 점령하겠다고 분투합니다. 다들 예수를 믿고 따른다면서 실제로는 예수적인 것들, 예수적인 방식들은 외면한 채 베드로적인 것들, 베드로적인 방식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적인 것들, 베드로적인 방식들이 교회 안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칼을 빼면 안 되는데 툭하면 칼을 빼어 휘두릅니다.

 

이제는 칼질을 멈춰야 합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야 합니다. 베드로적인 것들, 베드로적인 방식으로는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생명살이 할 수 없으니까 칼집에 도로 꽂아야 돼요.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지만 그래도 칼집에 도로 꽂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고,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피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만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고 생명살이가 시작되니까, 아버지의 나라는 오직 십자가에 죽는 방식,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에 짓밟히는 방식, 수치와 패배의 방식, 약함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 그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신 겁니다. 세상의 논리로 보면 말이 안 되지요.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한없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고, 생명살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갔습니다. 말이 안 되는 그 길,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그 길,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그 길을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정한 영광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칼을 칼집에 꽂고 무력하게 체포당하고 죽임당하는 그 길이 실제로는 참된 영광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사는 길도 사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그 길,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그 길,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그 길, 칼을 칼집에 꽂고 무력하게 체포당하는 그 길,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 길, 나의 인간성이 싫어하는 그 길이 사실은 하나님나라를 사는 길이고 생명살이를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삶의 방식이 전환되는 것, 베드로적인 방식에서 예수적인 방식으로 삶의 방식이 전환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