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놀라운 이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들은 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하게 오해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고 따랐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고독하고 외로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예수님 편에 선 자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했고, 모두가 등을 돌렸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v.32). 참 가슴이 서늘한 말씀입니다. 온 세상을 위해 오신 분이 온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외면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독특한 개성을 가진 분이라서였을까요? 사람과의 친화성이 부족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해받고 외면당한 것은 그분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유대 문화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였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일을 말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일을 말했기 때문에, 유대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외면당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한 통속이 될 수 없었던 것이고, 한 통속이 아니니까 일거수일투족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해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v.12)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너희가 지금은 내 말을 충분히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만 깊어지고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뿌리가 다른 분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해받고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분적 진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오해받으셨고, 철저하게 외면당하셨고, 철저하게 혼자셨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v.32)고 또 다른 진실을 말씀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였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내주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함입니다. 예수님이 여타 인간과 다른 점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돼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율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 자기가 앎의 주인이 되어 선악을 규정하고 사는 것이 자율의 삶인데 모든 인간은 줄기차게 자율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율의 삶, 자기가 왕 노릇하는 삶, 홀로 주인인 삶을 사는 것, 즉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알려는 욕망,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려는 욕망, 이것이 궁극적인 의미의 죄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악을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아무런 악을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죄와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살아가니까 이미 죄인인 겁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도덕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도덕에 어긋난 행동을 죄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도덕 자체가 이미 죄의 결과물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물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는데 왜 도덕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 듣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한데 왜 도덕이 필요하겠습니까.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기 때문에 생긴 물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니까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도덕이 필요합니다. 도덕이라는 질서 안에서만 삶이 가능합니다. 도덕이라는 질서가 없으면 삶은 끝없는 전쟁일 것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덕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은 타락한 인간이 만든 질서이지 하나님이 만든 질서가 아닙니다. 도덕은 타락한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이지 하나님나라를 지배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도덕이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도덕이 타락한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이 사람을 살리지는 못해요. 도덕은 언제나 사람을 억압하고 죽입니다. 자유를 억압하고 틀에 가둡니다. 도덕은 어쩔 수 없이 악의 질서고 타락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도덕의 지배를 받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도덕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도덕의 지배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독립적인 삶, 자율적인 삶을 산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의나 선악의 차원에서의 선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의입니다. 하나님이 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의이고, 하나님의 뜻이 의입니다. 설사 하나님 말씀이 도덕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것이 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를 따랐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세상의 도덕, 세상의 가치기준을 따라 살지 않고 하늘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거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나님의 일로 정교하게 만들어내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14:10-11)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한 것도 그거였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민15:41)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 무슨 말입니까? 함께 동거하자는 말입니다. 나는 너희 안에 거할 터이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거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동거하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는 드렸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히 동거한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온전히 동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냥 입에 담은 말이 아닙니다. 엄연한 실제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아버지 안에 거했고, 아버지는 실제로 예수님 안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깊이 상호내주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온전히 동거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좇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것이 다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v.15). 아버지의 영광을 하나도 잃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의 모든 비밀은 아버지와의 상호내주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후에도 오기 전과 동일하게 아버지와 상호내주하며 살았습니다. 아담 이후 누구도 하나님과 상호내주하며 살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홀로 그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사랑의 꽃을 탐스럽게 피워냈습니다. 생명살이를 옹골차게 살아냈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부족함 없이 향유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참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참 인간, 완전한 인간, 종말론적 인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또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예수님과 같은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상호내주 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 또한 하나님과 상호내주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막힘도 없이 상호소통하며 친밀하게 동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안에 품고 삽니다. 앉으나 서나, 일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항상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자라도 자식을 품고 사는데 사랑이신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당신 안에 품고 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항상 당신 가슴에 품고 살지 않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땅 속 깊이 내려가더라도,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으로 나아가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시139:8-9)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참 생명이 춤추지 못합니다. 사랑이 열매를 맺고 생명이 너울너울 춤추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품어야 합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하나님과 사람도 서로를 품어야만 사랑이 온전한 열매를 맺고, 생명이 너울너울 춤춥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받는다.”(요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요16:23)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를 품고 상호내주 해야만 사랑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생명이 너울너울 춤출 수 있습니다. 기쁨의 샘이 터지고, 평안의 잔이 넘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동거하느냐 별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인생이 달려 있는 것처럼, 학력과 능력에 인생이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거하느냐 별거하느냐에 인생이 달려 있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님과 동거하느냐 별거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과 동거하면 삶 전체가 생명살이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별거하면 삶 전체가 죽음살이로 나아갑니다. 온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도 동거하면 살고, 별거하면 죽습니다. 동물도 동거하면 살고, 별거하면 죽습니다. 식물도 동거하면 살고, 별거하면 죽습니다. 세포도 동거하면 살고, 별거하면 죽습니다. 지구도 태양과 동거하면 살고, 별거하면 죽습니다.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거하면 살고, 하나님과 별거하면 죽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만남이 맺은 열매입니다. 여러분도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만남이 맺은 열매입니다. 쌀 한 톨도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사랑과 만남이 맺은 열매이고, 빗물 한 방울도 사랑과 만남이 맺은 열매입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삶이란 사랑과 만남으로 피어납니다. 사랑과 만남이 함께 어우러질 때 거기서 삶이 피어납니다. 행복과 기쁨이 샘솟고, 안식과 감사가 우러납니다. 만일 사랑도 없고 만남도 없다면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는 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견뎌내는 것, 죽음을 사는 것, 지옥을 사는 것이지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고 예민해서 아무렇게나 피어나지 않아요. 삶은 사랑과 만남이 함께 어우러질 때 피어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어우러질 때, 하나님과 깊이 상호내주 할 때 생명이 절정에 이르고, 삶이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성령이 와야만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내주 할 수 있고,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내주 해야만 사람이 참된 인간, 완전한 인간, 종말론적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고, 사랑의 꽃을 탐스럽게 피울 수 있고, 생명살이를 옹골차게 할 수 있고, 아버지의 것을 부족함 없이 향유할 수 있으니까, 지긋지긋한 죽음살이 끝장내고 생명살이 할 수 있으니까, 생명이 절정에 이르고 삶이 절정에 이를 수 있으니까 하나님과 상호내주 하게 하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이 복잡다단하고 먹고 사는 일이 간단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거하는 일에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한 걸음씩 생명살이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꽃을 피워내고, 생명살이를 옹골차게 살아내고, 아버지의 것을 부족함 없이 향유하는 쪽으로 삶이 나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참된 인간, 완전한 인간, 종말론적 인간으로 회복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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