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야 할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성찬의 의식을 행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성찬 의식을 통해 십자가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보여준 예수님은 마지막 강화를 길게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시며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앞으로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를 차례로 올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복음의 요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음의 정수가 담겨 있는 기막힌 기도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담겨있는 금과옥조와 같은 기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중에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 여기에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옵니다. 한 번은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것이고, 또 한 번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가 세 번 더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영화롭게 되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 이것이 기도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영광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구했을까요? 또 영광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구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거룩함으로도 표현되고, 의로움으로도 표현되고, 사랑으로도 표현되고, 만왕의 왕으로도 표현되고, 생명으로도 표현됩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표현되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창조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냄으로써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과 열방을 심판함으로써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시8:1, 19:1, 57:11, 출14:17-18).
사실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돼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구름도, 뇌성도, 하늘의 별도, 호랑이도, 원숭이도, 꽃과 나비도,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만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당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온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부어주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 영광이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이 보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곳이 없어요.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 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눈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듯이 명확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얼마나 충만한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계21:23).
특히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요1:1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흘러넘쳤습니다(요1:14,16).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충만하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도 충만하셨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요14:9). 그렇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할 만큼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고의 계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계시하기 위해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행한 것도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일이었고(요2: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것도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일이었고(요4:53),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도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일이었습니다(요5:18).
지금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순전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고(요14:31),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아들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고,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때가 되자 지체 없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의 죽음이 한없이 비참한 일이고, 패배의 길이고, 수치의 길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숨어있는 영웅 심리가 발동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들끓고 있던 희생정신이 발동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알았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책무임을 알았기에 혼자서 묵묵히 아버지께 기도하며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사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계시이지만 사람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시자로 디자인 되었다는 뜻입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자로 디자인된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됐습니다(롬3:23).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고(롬1:23), 하나님의 영광 대신 세상의 권세와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대신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세상의 영광에 더 열광하고, 돈, 인기, 성공에 더 목매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자기가 갈 천국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영광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세상의 영광에 열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태양 빛이라면 세상의 영광은 촛불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세상의 영광에 열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갈망합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옳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사람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의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를 봅시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충만하셨고(요1:14),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빌2:6).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할 수 있을 만큼 은혜와 진리가 풍성했습니다(요1:14, 14:9). 더욱이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로서 세상을 창조하는데 참여했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습니다(요17:2). 출렁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귀신의 권세를 꺾고 쫓아내셨습니다. 로마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도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셨고 당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아버지로부터는 자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는 독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는 당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매사에 아버지를 의지했고, 매순간 아버지께 신실했습니다. 자기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의지로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려 하지 않고 아주 겸비한 자세로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자기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보십시오. 하나 같이 아버지 중심적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v.2). 자기가 가진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도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v.2). 자기가 한 모든 일도 아버지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이라고 표현했고(v.4),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도 아버지와 함께 가진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v.5). 정말 모든 표현 속에 아버지 중심적인 태도가 녹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약한 아들 같다는 느낌이 들 만큼 철저하게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께 구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아들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살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사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 방식이고, 그래야만 아들이 영화로울 수 있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에 의지해서만 유영할 수 있고, 새는 창공에 의지해서만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에 의지해서만 아들로 존재할 수 있고 아들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아버지께 의지하고, 아버지께 구하고, 아버지께 신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약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모든 것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나면 곧 어둠이요 죽음이기 때문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아버지께 의지하고, 아버지께 구하고, 아버지께 신실했던 겁니다. 그분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고, 생명의 떡이고, 세상의 빛이고, 온 세상을 창조한 말씀인데도 그랬어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영화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아버지를 통해서만 영화롭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의지로 되겠습니까? 내 믿음으로 되겠습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뜻대로 살겠다며 열심히 노력하고 의지의 칼을 가는데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의지가 발동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구원을 사는 게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게 됩니다. 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확신하고 믿음에 매진하는데 믿음에 방점을 찍는 순간 믿음은 신념으로 추락하고, 자기 안에 갇히는 자폐가 돼버립니다. 은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믿음이 능력이 돼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좌우지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일하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사랑으로 섬기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지혜로 분별하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담대함과 겸손함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만일 자기 열심이나 노력이나 의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니에요. 그것은 종교인의 삶, 자기 경건의 삶일 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권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무슨 말입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순간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순간 넘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고,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름에 빠지고, 빛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둠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해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길이 없어요.
예수님이 기도 중에 영생이 무엇인지를 기막히게 말씀했습니다. 영생이 뭐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7:3).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알듯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들은풍월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함으로써 아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됨으로써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곧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영생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거예요.
옳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참 생명(True Life)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하며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기를 호흡하고 밥을 먹어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이 살듯이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해야만 삽니다. 만일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하지 않는다면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영생도 사라집니다. 영생은 단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 사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당연히 영생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이고 하나님만이 영광이니까,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광으로 충만한 생명이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영광으로 충만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수액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에게 붙어 있어야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쉼 없이 강조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나를 믿으라. 나를 영접하라.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생명을 살 수 있으니까 나를 믿으라고 나를 영접하라고, 내 안에 거하라고 그렇게 강조한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가야만 성령을 보낼 수 있고, 성령이 와야만 예수님이 사람들 속에 거할 수 있으니까,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으니까 성령을 보내시려고 아버지께로 가신 겁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와의 관계에 신실했습니다. 지극히 겸비한 자세로 아버지께 의지하며 구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가 작아졌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이 구겨졌습니까?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존재가 빛났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하고, 지극히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엎드리면 우리의 존재가 작아집니까? 비루해지고 나약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가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던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살게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됩니다. 마음의 쓴 뿌리와 독이 빠지고, 막혔던 게 뚫리고, 오그라졌던 게 펴지고, 갇혔던 게 해방됩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아요. 마술처럼 하루아침에 짜잔~~ 하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구원받아가는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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