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로 가득한 물리적인 세계를 만들지 않고 당신이 거하시는 집을 만드셨습니다. 사랑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 끝없이 광대하시고 창발적인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을 만드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일하는 일터이고, 하나님이 즐겁게 춤추며 노는 놀이터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온갖 생명이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일터이고, 하나님의 놀이터입니다. 그것도 대충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집, 하나님의 존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집,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듬뿍 담긴 집, 하나님의 창발성을 무한히 담아내는 참으로 멋진 집이고 광대한 나라이고 창발적인 일터이고 환상적인 놀이터입니다.
요즘은 아파트 시대라서 집의 개성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습니다만 집이란 본래 주인을 닮는 법입니다. 어느 집이건 간에 집에는 주인의 성품이 배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을 보면 그 집 주인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세상도 집 주인인 하나님을 알게 모르게 닮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른 뭔가를 보고 카피한 게 아니라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집 주인인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한없이 아름답고 조화롭고 다채롭고 오묘하고 찬란하고 광대하고 끝없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열려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만든 세상 또한 그러합니다. 이 세상도 잘 보십시오. 정말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고 조화롭고 다채롭고 오묘하고 찬란하고 광대합니다. 또 끝없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꼭 닮았어요.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온갖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지만 제일 먼저는 하나님을 닮은 집, 하나님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집, 하나님의 존재와 잘 어울리는 집,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듬뿍 담긴 집, 하나님의 창발성을 무한히 담아내는 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터, 하나님의 놀이터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기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터, 하나님의 놀이터 뿐 아니라 사람의 집, 사람의 나라, 사람의 일터, 사람의 놀이터로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실 뿐 아니라 사람도 주인인 세상, 사람에게 세상의 운명을 맡겼다고 해도 될 정도로 사람의 역할을 중시한 그런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에게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위임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위임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습니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기 원한 것만큼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 세상을 다스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하겠다며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자기가 완전한 주인 노릇 하겠다며 하나님 방을 빼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추방시켜버렸어요. 이 세상은 내가 다스릴 테니 당신은 하늘에서 편안히 주무시라고 하늘로 추방시켜버렸어요. 물론 하나님이 정말 하늘로 추방당한 건 아닙니다. 사실은 정반대예요. 사람이 하나님을 하늘로 추방시킨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집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보면 일단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없는 셈이 됐고, 세상에서 추방당한 셈이 됐습니다.
그 결과 세상이 어떻게 됐습니까? 온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한 죄악의 소굴이 됐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하는 추악한 세상이 됐습니다. 하나님을 닮았던 집이 - 하나님을 닮아서 한없이 아름답고 조화롭고 다채롭고 오묘하고 찬란하고 광대하고 끝없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열려있던 집이 형편없이 뭉그러져버렸습니다. 악이 들끓고, 중상모략이 판을 치고, 시기와 무자비한 살인과 언쟁과 속임수가 출렁이는 욕망의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하나님을 닮았던 사람 또한 형편없이 망가졌습니다. 비열하고, 독하고, 일구이언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둔하고, 잔인하고, 냉혹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됐습니다(롬1:29-31). 이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었는데 하나님의 집이 아닌 것이 돼버렸고,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할까요? 사람에게 화풀이 하면서 보복해야 할까요? 세상을 뭉그러진 채로 방치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세상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고, 세상의 궁극적인 주인 또한 하나님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이 나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형편없이 뭉그러진 세상을 고쳐서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일, 형편없이 일그러진 사람을 고쳐서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그 일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를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엘리야를 부르셔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형편없이 뭉그러진 세상을 치유해서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라고,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을 치유하여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라고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 일을 온전히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내가 이루었습니다.”(요17:4)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최후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 일을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 것(요17:6),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준 것(요17:8), 이 두 가지가 자기가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형편없이 뭉그러진 세상을 치유하여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을 치유하여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한 것인데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를 보게 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어떤 말이 됩니까? 아버지를 보는 눈이 열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면 세상이 하나님의 집으로 회복되고, 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세상을 뜯어고치고 발전시킨다고 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집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죄인을 도덕적으로 훈련시키고 마음과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해서 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뜯어고치고 발전시켜야 하는 줄 알고 거기에 몰두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줄 알고 거기에 몰두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문제, 사람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세상의 운명이 도덕적으로 선하냐 악하냐, 종교적으로 경건하냐 불경하냐에 달려 있지 않아요. 세상의 운명은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들, 혁명가들, 철학자들, 종교인들, 예술가들, 거리의 장삼이사들 모두가 무시합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며 비웃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인간의 운명, 세상이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맨 처음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됩니다. 여러분, 최초의 사람 아담이 선하지 않아서 세상이 이렇게 됐습니까? 경건하지 않아서 세상이 이렇게 됐습니까? 머리가 똑똑하지 않아서 이렇게 됐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됐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온 세상이 뭉그러진 것이고, 온 백성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뭉그러진 세상을 회복하고 망가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해법을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이 진정한 해법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일 하지 않고 그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하고,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만 이런 일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이 사용한 어법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어법, 즉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어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본래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어법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한 어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이다’ 어법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어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어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내 말은 다 아버지의 말이다, 라고 말씀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이 몽땅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입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이 한일은 사실상 두 가지입니다. 아버지를 볼 수 있도록 세상에 드러내는 것, 아버지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상에 선포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예수님이 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집으로 새롭게 회복되고, 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나니까 그 두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아버지를 볼 수 있도록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고, 아버지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의 귀를 열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준비도 없이 사전 교육도 없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조차도 모르는 채로, 성경 말씀을 읽어본 적도 없고 공부한 적도 없는 채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말자 온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분명히 똑같은 하늘이요 똑같은 땅인데 갑자기 전혀 다른 하늘 전혀 다른 땅으로 보였습니다. 풀 한 포기 모래알 하나까지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전에는 물은 그냥 물이고 산은 그냥 산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모든 것이 경이롭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솜씨가 깃든 작품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선물로 보였습니다. 나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전에는 나는 그냥 나였어요.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하나님을 닮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경건의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대오각성 하여 착해진 것도 아니고 단지 예수를 만났을 뿐인데 내 존재가 새롭게 인식됐습니다.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이 말씀이 화살처럼 제 가슴 속에 날아와 박혔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도 낯설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제 품에 들어왔습니다. 온 세상이 내 집처럼 평안했습니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 때는 그런 인식도 없이 그냥 평안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뿐이고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뿐인데 그런 변화가 일어났어요. 인식은 희미했고 아무 것도 아는 건 없었지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인식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인식의 문이 열렸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인식의 문을 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한 것에서도 이런 사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뭐였습니까? 저들을 지켜주시고 하나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요17:11). 이 기도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 곧 자기를 영접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17:9).
그렇다면 물읍시다. 예수님은 왜 세상을 지켜 달라, 온 세상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통 크게 기도하지 않고 제자들을 지켜 달라,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좀스럽게 기도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이 세상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재창조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뿌리부터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집으로 회복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겁니다.
또 온 세상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것도 그것이 허망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등지자말자 어떻게 됐습니까? 곧바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세계는 절대로 하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은 이미 에덴에서 추방당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듣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허망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기도요 아버지의 계획을 거스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 하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을 지켜 달라, 저들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별 것 없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것이 정말 많았을 텐데, 제자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도를 하지 않고 고작 지켜 달라,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별 것 없는 기도를 했을까요?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이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하나인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삼위일체가 아닙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삼위일체십니다. 삼위일체, 삼위의 하나 되심, 이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존재적 특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결국 제자들이 하나님을 닮은 공동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의 공동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 말씀을 증언하는 작은 하나님의 집, 작은 하나님의 나라, 작은 하나님의 일터, 작은 하나님의 놀이터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아버지를 보는 눈이 열리고 아버지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는 것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회복하는 길이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길이니까 다른 것 기도하지 않고 이 두 가지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은 정치적 혁명으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경제로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고 충만해집니다. 사람도 도덕으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로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교양이나 종교적 경건으로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고 충만해집니다. 세상의 왕들, 혁명가들, 철학자들, 종교인들, 예술가들, 거리의 장삼이사들 모두 이 사실을 무시하고 조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장 정직한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깊이 간직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일터요 놀이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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