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짐을 지라 (갈 6:1-10)

새벽지기1 2017. 1. 15. 08:27



1. 남의 짐을 지라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서로 짐으로 성취해야 할 그리스도의 법이 있다.

(갈5: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육체를 위한 자유가 아니다. 죄를 위한 자유가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이것이 바로 짐을 서로 지는 것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럼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하는 사랑인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이웃사랑인가?

누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슈바이쳐처럼 간디처럼 살면 성경이 말씀하는 이웃사랑인가? 그렇지 않다.

 


(일본 재난에 이웃돕기 성금으로 우리가 5일만에 백억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 불우한 이웃을 위해 성금을 많이 내놓는 사람들인가요?

일본은 경제 대국이다.

밥먹으러 가서 부자는 가만이 있는데 괜히 가난한 사람이 밥값 먼저 내기 바쁜 건 아닌가요?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들은 평소에 이웃돕기를 꾸준히 하지

갑자기 이벤트성 과시성 성금 모금한다는 말은 과문인지라 못들어 봤다.

잘못된 정책에 수백억 수천억을 쏟으면서도 책임지는 사람 없고

건수만 생기면 국민들을 동원해서 성금을 모으는지 모르겠다.

언론이 광고와 독려를 안해도 저렇게들 내놓을까요?

후진국에서 성금은 준과세의 성질을 띄운다.

정경유착 정언유착 정예유착으로 번 돈들이라 정부가 나팔을 한 번 불기만 하면

경쟁적으로 내놓고 과시하고 아부하고 투자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진리를 제껴 놓은 채 사랑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리 없는 사랑,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이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그렇게 맘만 먹으면, 강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충동적인지 모른다.

입으로는 만인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지만

제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랑 못하는 것이 사람이고

이해관계가 얽히면 자기 유익이 먼저이지 남의 유익은 강건너 불이기가 십상이다.

 


산속에서 도 닦는 사람들도, 애낳고 서로 부대끼는 가정생활 해봐야 알고,

안방에서 도 닦은 옛 선비들이나 양반들도,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들한테 들어봐야 안다.

악처가 위인과 철학자를 만든다고 하지만, 위인과 철학자가 악처를 만드는 줄은 모른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웃 사랑은 다른 말로 하면 이웃 대접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접을 받을려고만 하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해줄려고 하지 않는다.

부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이웃과(나라끼리)의 갈등, 항상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요?

그렇게만 한다면 인류사회의 모든 갈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카다피 같은 수많은 독재자들도 어떤 기득권자들도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하나님 없는 육체가 하는 사랑은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요 세상적일 수 밖에 없다.

황금률의 의미를 잘 알려면 그 앞과 뒤의 말씀을 살펴 보아야 한다.

그 앞에 말씀은 이렇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만 사랑하라는 분이 아니시고, 받고 싶은 것 이상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실 수 있다. 받는 것보다 더 줄줄 아는 자가 남을 대접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말씀이 한 군데 더 있다.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성경은 관련 성구들을 종합해서 해석을 해야 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이라고 한다,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황금률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라고 한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한다.

셋은 결국 하나이다.

 


이웃 사랑은,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한 것이 둘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이 있다고 하신다.

 


첫째 되는 계명 없이 둘째 계명을 이룰 수 없다.

두 계명은 밀접하게 관련이 돼 있고, 순서를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자만이

엄밀하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순서대로 사는 것이 온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이다.

이 두 계명을 지키면 온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온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을 할려면

하나님 사랑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이웃 사랑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벤트성 요란한 이웃사랑이 일시성으로 끝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금률을 말씀한 바로 다음 구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황금율대로, 온 율법을 이루는 대로, 사는 자들은 지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 적다. 적다. 많지가 않다.

 


그렇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왜 많은가? 세력을 좋아하고 대세를 좋아하고 유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길로 인도하는 일만 스승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바로 뒤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신다.

그들이 바로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7:15-16)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열매를, 하는 짓들을 보지 않고,

겉에 입은 양의 옷만을 보고 그들의 화려한 말만을 본다.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것이 행위의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화려한 양의 옷만을 본다.

(기독교 연합 단체 회장이 되기 위해 목사들한테 돈봉투를 나눠주고 양심선언들을 뒤늦게 하고 법원이 잘못됐다고 판결하는 데도 그 양반은 대통령 무릎 꿇린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금도 굴하지 않으며, 그것을 보고도 그 교회 교인들은 떠나간다는 소식은 못들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마련이다.

(갈 5:7-9)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그 권면들이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나온 진리인지 아닌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넓은 문과 많은 사람들에 압도되어서 진리보다는 누룩을 택하고 만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인지 길인지도 모르고 그 물결 속에 함께 휩쓸려간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자들이 적은 것을 모른다.

 


우리 주님 말씀하신다.

(눅 12:1-2)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마 16:6,12)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은 잘못된 율법을 대표하고, 사두개인은 세속화된 사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저주받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들이 양의 탈을 쓰고 감추고 있지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그렇지만 때를 놓치고 나면 멸망으로 인도되고 만다.

 


2 자기의 짐을 지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온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을 이룰려면

순서를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 대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남보다는 자기를 대접하기를 더 좋아한다. 왜 그럴까요?

 


거듭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교만 때문이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잠언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잠6:16-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니라

 


우리는 항상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행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항상 기도하고 말씀에 깨어있지 아니하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다.

안다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돌비에 아니라 심비에 새겨져야 행하게 된다.

 


긴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기기 위한 연단의 세월들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내 인생의 주추를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들어갈 수 있다.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주님을 내가 따라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져야 할 짐이다.

내가 된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나를 돌아보고 나의 짐은 내가 스스로 져야 한다.

 


믿고 행하는 것, 이것이 내가 져야 할 짐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회개할 수 없고,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내가 죄를 회개해야 내가 천국을 살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서고 바로 행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나는 다 되지 않았고, 더 성숙하고 더 성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야 한다.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게으름은 빈궁과 곤핍을 가져올 뿐이다.

(잠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 성숙과 성장에도 빈궁과 곤핍이 강도와 순같이 이르고 만다.

 


사도 바울도 성령을 힘입어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했다.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져야 할 짐이다.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세상에서도 거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내 육체의 탐욕을 위한 달음질은 사망을 낳을 뿐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을 향해,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한다.

 

3 배움의 짐을 지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내가 내 짐을 짐으로 홀로 서야, 이웃의 짐도 져줄 수 있다.

홀로 서지 못하는 자들은 의존적이고 남 핑계만 대고 원망과 불평이 많다.

홀로 설 줄 아는 자들은 독립적이고 남 핑계 대지 않고 불만이 적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만 짐을 지우고 내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시다.

가르치는 자를 붙여 배우게 하여 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신다.

되지도 않았고 형편도 말이 아닌 사람들이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가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축복과 영광이 나의 성품 됨됨이에 달려 있는 줄을 안다면.

그 축복의 그릇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난과 연단으로 수고하시는 줄을 안다면,

스승을 찾아가고 만나고 배워야 한다.

 


가르침을 받아야 배워야 홀로 설 수 있고 자기 짐을 질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의 짐을 져줄 수 있다.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복음으로 생명을 낳을려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해산하는 수고를 스승과 함께 하지 않고 내 안에 생명을 낳을 수 없다.

변화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제 복음을 따라 스승과 함께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 그 열매를 성품 가운데 삶 가운데 맺을 수 있다.

 


그 해산하는 스승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하신다.

운명공동체가 되라는 것이다. 이익공동체는 이익 때문에 뭉쳤다가 찢어지는 관계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돈 놓고 돈 먹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헌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심고 거두는 것은, 남의 짐을 져주고, 내 짐을 지고, 배우는 짐과 관련이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홀로 서고, 복음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배우지 않고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사도들도 오순절 성령의 불을 받고 제일 강조하여 하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로 다시 생명을 낳고 심고 거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낙심할 때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스승과 함께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러면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되고, 때가 이르매 거둘 날이 온다. 아멘.

 


왜 내 인생과 내 가정은 이 모양이냐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다.

생명과 축복을 낳는 복음을, 배우고 사는 일에,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될 것이고, 그 선을 행할 때 거둘 날이 반드시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