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목적과 배우는 목적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자세와 배우는 자세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제자가 스승같으면 족하다고 하셨다.
(마 10: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배움의 목적을 생각하게 해주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사내가 무림의 고수를 찾아간다.
제자로 입문한 사내는 스승에게 묻는다. “얼마를 배워야 원수를 벨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잘라 말한다. “20년”.
제자가 놀라 묻는다. “그렇게 오래 배워야 합니까?”
“너는 한 30년 걸리겠다.”
“아니, 그러면 원수는 언제 갚습니까?” “너는 40년으로도 안되겠구나”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완전한 자로 세워지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완전한 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한 자이다.
(엡 4:13)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완전한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자이다.
(갈 4:1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완전한 자는 그리스도의 참되 제자를 말한다.
복음서에서 제자는 바울 서신에서 완전한 자 성숙한 자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모든 지혜로 가르친다고 했다.
우리는 이 모든 지혜를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배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배우는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한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생명을 낳기 위함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대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우는 목적이다.
제자를 삼아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제자를 낳고 그들이 또 제자를 낳게 하는 것이 우리의 또다른 배움의 목적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일을 할 때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충성된 자들을 낳고 그들이 또한 다른 제자를 낳게 하기 위함이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해야 한다.
무엇으로 생명을 낳을 것인가?
바울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한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는 것이 참 스승이고 아버지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들이 있지만,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는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아비를 만나야 한다.
청교도들이야 말로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아비들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들은 뭘 가르치는 걸까요?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다른 지식들을 전달한다는 얘기이겠지요.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한다.
(갈1:7-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는 오직 순수한 복음에 충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신학대학과 교회들이 다른 복음들을 참복음처럼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고후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이 배움의 목적을 위한 우리의 자세이다.
배우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생명을 낳는 것이 목적이니 당연히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줄로 믿는다.
바울의 이 해산하는 수고는 우리가 배울 때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도 거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인생에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가 없다.
배우는 자세로 주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다.
(눅 14: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배우는 자세를 이렇게 가다듬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변화와 유익이 없을 줄 안다.
나실인성경원을 정식으로 시작하면서, 새학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자세를, 이렇게 다지고, 다짐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우리가 배우는 자세로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다.
바울은 푯대를 정하고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다.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어때요? 우리도 이렇게 배움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푯대로 하여
달려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이다.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 데,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지 않겠는가?
생명을 낳고 제자를 낳는 일에 열매가 있지 않겠는가?
또한 배우는 자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이 비장한 각오의 말씀을 이 시간에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배움의 목적과 자세를 분명히 할 때, 우리는 배움의 기간은,
참으로 유익한 시간들이 될 것이다.
'좋은 말씀 > 강대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기도(거룩 하나 영광) (요 17:17-24) (0) | 2017.01.17 |
---|---|
짐을 지라 (갈 6:1-10) (0) | 2017.01.15 |
믿음의 확증 (고후 13:5) (0) | 2017.01.12 |
질그릇에 가진 보배 (고후 4:7-11, 16-18) (0) | 2017.01.04 |
하나님의 나라 (롬 14:17-18) (0) | 201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