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교회를 향한 비판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말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기도하지만 실제로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도 않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보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서 더 뛰어난 것도 아니다. 이런 윤리적 실천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에 상관없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성윤리에서도 그렇고, 경제윤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남지역에서 아파트 투기하는 분들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하는 건데, 신앙이 실제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해야 할 질문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윤리에 중심을 둔 설교를 하고, 그런데 중심을 둔 목회를 꾸린다. 기독교인답게 정직하고, 정의롭고, 희생적이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약간 접근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목사나 진보적인 목사의 관점이 모두 비슷하다. 전자는 주로 개인윤리에, 후자는 사회윤리에 천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더라도 사람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바뀔 수 있다. 줄담배 피우다가 담배를 끊고, 놀음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손을 씻고 몰라보게 새로워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제자훈련을 통해서 매일 자신을 신앙적으로 성찰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제법 많다. 우리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사람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로 세련된 교양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단지 무늬의 차원에 머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가 교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론 교양은 필요하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편한 반면에 교양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짜증스럽다. 종교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교양은 그렇게 결정적인 게 못된다. 그것은 삶의 능력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오늘 중산층 교양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한국사회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복음은 윤리 너머의 차원이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는 일종의 윤리라 할 율법에 의한 역사적 예수의 죽음이며, 부활은 인간의 종교적 업적과 윤리적 행위와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배타적 생명사건이다. 이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는 데에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말하자면 복음은 메타-윤리적 차원이다.
복음의 메타-윤리적 차원이 기독교 영성의 자리이다. 음악경험을 비유적으로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아리라 “밤의 여왕”을 노래했다고 하자. 그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과 존재론적 일치를 경험했다. 그 순간에 그가 얼마나 윤리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의 원초적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면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온전한 음악경험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은 순전히 음악의 세계일뿐이다. 복음도 역시 그렇다. 여기에는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차이가 없다. 바울은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고까지 말했다.
기독교 신앙이 윤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 윤리는 신앙에 의한 하나의 귀결이다. 신앙의 중심은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사건이며, 윤리는 그 사건에서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도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 규범들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듯이 신자들에게 일일이 살아가는 방법까지 지시하곤 한다. 그런 것들은 신앙 이전에 상식이며 교양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생각해야 할 대목들이다. 상식과 교양을 복음인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윤리의 근거는 자기 안에 놓이는 게 아니라 복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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