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소문에 귀가 익고, 소문을 잘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선거 때마다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것이나, 신흥 종교와 이단사설이 끊이지 않는 것이나, 사기 행각이 멈추지 않는 것도 실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영악한 듯하나 실은 어리석을 정도로 쉽게 믿습니다. 보험설계사가 하는 말에 솔깃해 계약을 하고, 옷을 판매하는 아가씨의 ‘언니, 이 옷 언니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는 한 마디에 혹해 카드를 긁습니다. 이외에도 사람이 얼마나 잘 믿는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잘(쉬) 믿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요? 서로를 잘(쉬) 믿으면 신뢰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신자들이 하나님을 잘(쉬) 믿으면 교회의 영성이 깊어지는 것일까요? 저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쉬 믿는다는 것은 그 속(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믿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인데,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믿음으로 과연 신뢰가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믿음으로 과연 하나님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겠습니까? 속알이 없는 믿음은 자기 확신과 신뢰의 모양새만 갖추었을 뿐 믿음의 실체는 없다고 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의 모양새로야 강고한 진(陣)입니다. 타자와 외부의 개입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자폐적 진(陣)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쉬 믿는 믿음은 신뢰사회를 이루는 데에도,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아픈 걸림돌일 뿐 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모리스는 저서(파스칼의 질문)에서 8살 된 딸 사라와 6살배기 아들 매튜 사이의 짤막한 일화를 전합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와 아들이 상식 맞추기 게임을 했는데 문제가 쉬워서 게임이 좀 싱거웠던 모양입니다. 잠시 게임을 멈추고 간식을 준비하는 시간에 아들 매튜가 “아빠, 게임을 어려운 문제로 만들면 좋잖아요. ‘왜 신은 태어나지 않았나?’와 같은 아무도 대답을 못할 질문으로요.”라고 한 마디 하더랍니다. 그런데 부엌에 있던 딸 사라가 이 말을 듣더니 대뜸 “이 멍청아, 신은 언제나 있으니까 그렇지.”라고 쏘아붙였답니다. 그러자 매튜는 얼굴을 좀 구기더니 목소리를 낮춰 아빠에게 말했다고 해요. “어떤 땐 내가 정말로 뜻하는 말을 제대로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신은 어떻게 있게 된 거죠?”라고 말이죠. 그러자 이번에도 동생의 말을 엿들은 사라가 좀 짜증난다는 듯이 “그냥 나타난 거야.”라고 쏘아붙이더랍니다.
참 귀엽고 재미난 장면이지요? 당신은 이 일화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매튜와 사라 중 누가 더 견고한 믿음을 가질 거라고 생각되시나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매튜가 회의주의자로 성장할 수도 있지만, 사라보다 더 견실하고 깊이 있는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많다고 상상합니다. 반면에 사라는 회의주자는 안 되겠지만 그렇고 그런 보통의 신자(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믿음 좋은 사람들)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상상합니다.
쉬 믿는 것은 순진함도 아니고, 하늘로부터 임한 은혜도 아니고, 진리의 영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쉬 믿는 것은 한 마디로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름일 뿐입니다. 잠자는 이성의 무기력일 뿐입니다. 기실 믿음은 이성의 도약이긴 하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또한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은 질문을 금기하는 영이 아니라 질문을 잉태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쉬 믿는 것은 믿음의 본질에 어긋납니다. 쉬 믿는 것은 가장 커다란 믿음의 걸림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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