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남준목사

예수님의 중보기도 (눅 22:32)

새벽지기1 2016. 8. 12. 09:57


예수님의 중보기도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I. 본문 배경


이 부분은 예수님의 생애 후반부로 접어 들어가는 부분으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중보기도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제자들을 청구하였으나 그 중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고 직접 고백하고 있는 대목으로,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기록 가운데 아주 특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 영적 실재를 보여주심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벌어졌습니다(눅22:24).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러한 다툼을 보시고 그들의 그러한 생각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시며 매우 슬퍼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누가 높은가를 따지면서 자신들의 입신양명만을 구하는 제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사단에 관한 말씀이셨습니다. 사단이 그들을 청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키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도록 다 털어 낼 쭉정이는 넘겨 달라고 청구했다는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눅22:32)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도의 삶의 영적인 실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자신이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내면은 전부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곧 넘어질 사람들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케 되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빌3:12),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살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그런 겸비한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붙드신 것을 우리의 유일한 의로 여기며 그분만을 붙들면서 살려고 하는 진실한 신앙생활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실재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권세를 받았던 사도들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였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운 사람들입니까? 까부르면 바람에 훨훨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빈 껍질과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이고 언제나 사단에 의해서 청구를 받는 힘없는 존재들임을 알고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주님의 은혜요, 또 앞으로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신자가 되는 것도 또한 주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시시때때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우리에게 무슨 영혼의 새로운 소망이 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III. 예수님의 중보기도


이러한 영적인 상태에 있던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은 서로 높아짐을 다투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 중 한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실족하여 당신을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실족할 베드로를 향해서 어떻게 그를 견고하게 붙들어주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드린 간절한 중보기도였습니다.


A. 견고한 믿음을 위해 기도함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무엇을 가장 중심적인 목표로 삼고 기도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시몬 베드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예수님은 완전하신 목자였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친 진리 중에는 허튼 것이 없었고 그분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능력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이 없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믿음으로 붙들어 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떨어질 듯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이제껏 신앙 생활해 온 경력으로 우리 스스로 잘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본이 갖추어지고 그 기본 위에서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더 상위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늘 떨어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전혀 자만할 수 없는 것은 불과 몇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짐승처럼 살았던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믿음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굳건히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혼들을 섬기다 보면 무엇을 해도 그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조직해서, 앉혀 놓고 친절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가르쳐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를 특별히 더 사랑해 주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물질로 섬기거나 혹은 어려워하는 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마음을 써도 그 영혼이 변하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열심히 섬기지만,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영혼을 섬기는 우리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모든 섬김이 그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매달려 그 영혼을 변화시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많은 섬김으로도 변화되지 않던 영혼의 믿음이 다시 회복되고 위기에서 믿음을 굳게 붙드는 일들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을 위한 이 기도는 영혼이 굳게 서는데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기도의 섬김 : 중보기도로 견고해지는 믿음

장시간을 기도에 바치며 사신 예수님의 기도의 대부분은 영혼들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굳건히 붙들어 주기 위해 헌신적인 기도로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연약한 영혼들을 얼마나 만나나요? 다섯 사람, 열 사람쯤 만납니까? 혹은 백 사람쯤 만납니까?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어서 오늘날 역사적인 장로교가 서게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존 낙스가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그렇게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그의 뒤에서 그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기도하던 그의 장인 존 웰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흔히 존 낙스의 기도로 알려진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사실은 낙스가 아니라 존 웰치가 하였던 기도라고 합니다. 존 웰치는 하루에 삼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영혼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잠자다가 부인이 눈을 떠보니 남편은 어느새 침대 아래서 가슴을 쓸어안고 흐느끼면서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여보 빨리 잡시다. 밤에는 자야하지 않겠어요” 하면, 그는 “여보 내가 하루에 삼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그대도 알지 않소. 내 기도가 아니면 쓰러질 것 같은 수많은 영혼들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리는데 어쩌란 말이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에 비춰보면 우리는 거의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에 단 오십 사람을 위해서, 아니 단 열 명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연약한 중보기도의 모습들이 바로 지체들이 견고한 믿음으로 붙어있지 못하고 수시로 떨어지는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을 한다면 성경의 지적이 너무나 가혹하게 들리십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순간이 다가오는데 서로 자기가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사단에 의해서 까불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낙망하지 않으시고 그 영혼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고, 특별히 베드로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던 중보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설교의 재능도 없고 배와 그물을 버려 둔 제자들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등지고 선교의 장도에 오를 수도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재능이 없어서, 자격이 되지 않아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오랜 신앙의 연조를 가진 사람이나 방금 믿기로 시작한 사람이나, 빈부나 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든지 주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믿음 가운데 흔들리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믿음 가운데 굳게 서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C. 타인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 사랑 없음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밖에 없는 영적 이기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 할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함께 주의 사랑을 받은 지체들이 너무나 소중해 보이는데, 우리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베풀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추위에 떠는 지체들을 보고 ‘몸을 덮게 하라’는 말로 자기의 의무를 다할 수 있으며 굶주린 자들을 향해서 ‘너는 배 부르라’고 말함으로서 형제 사랑의 의무를 대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약2:16).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죽은 믿음인데, 사실은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영혼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베풀지 않을 수 없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나눠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조금 움직이면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크게 움직이면 우리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체를 위해서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원리이고 기도의 은혜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에는 제자들의 얼굴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생활의 대부분을 그렇게 핍절한 영혼들이 믿음 가운데 돌아오고, 돌아온 그 영혼들이 믿음 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하고 기도하는데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비춰보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영혼들의 곤궁함을 보면서도 우리는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영혼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곤궁하고 쓰러지는 영혼들을 보면서 그 영혼들이 그렇게 넘어지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하는 깊은 자책감이 없습니다. 쓰러지는 영혼들을 보면 그저 그들 자신이 강퍅하기 때문에 미끄러지고 쓰러진다는 책망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들어옵니다. 이것은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는 사단 앞에서 잠시 후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입니까? 이 모두 우리에게 사랑 없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지 않는 것은 바쁘기 때문도, 시간이 없기 때문도, 우리의 육체가 피곤해서도 아니고, 그 대답은 오직 한 가지이니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경험을 갖게 되면 항상 두 가지가 한꺼번에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주님의 사랑을 받음으로 인한 행복과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아픔, 고통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내가 견고한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견고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서 축복을 잃어버리는 영혼들의 불쌍함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경험입니다.


D. 예수님의 중보기도 사역의 계승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도를 통해서 영혼들을 섬기는 그 세계에서는 항상 현역이요 항상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할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이기에 그 일을 뒤이은 우리를 보시며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시고 그 영혼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게 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래서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우리의 그러한 성취들을 인해서 조금도 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 받은 많은 성도들 사이사이에 끼어서 가려진 핍절한 영혼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울지 않음으로 그들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우리의 눈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마름으로 그들은 다시 세상에 흘러가 버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며 끌어안고 그들의 영혼이 내 영혼인 것처럼 슬퍼하며 기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히 그들의 미끄러짐을 그들의 강퍅함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위해 충분히 기도로 섬겼다면, 지금 어두움 속에 있는 여러 지체들이 빛 가운데서 주님을 찬송했을 것이고, 우리보다 더 훌륭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진실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살려주셔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보이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빛과 은혜의 열기를 전해주도록 그렇게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화를 입은 사람, 그 은혜에 빚진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분처럼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그분처럼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키는 길이고, 믿음 안에서 사는 길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의 곤궁함을 인해서 슬피 울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지금도 보좌우편에서 우리의 곤고함을 인해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기도의 생애를 기억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 눈에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비셨던 그 중보기도의 사역들을 계승해나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생애를 통해서 이런 거룩한 교훈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혼자 잘 서서 마음을 지키며 믿음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비료로 삼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이 연약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며 울었고, 울고 있고, 앞으로도 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끝나지 않은 당신의 중보기도의 사역을 이으시며 이 험한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계승해야 할 사역입니다.
죄도 없으시고,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계시지도 않은 그분이 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을까요? 그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눈물이었고 우리를 위한 통곡이었고 우리를 위한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염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을 염려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염려를 한다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염려, 육신의 영달과 육신의 안일을 위한 모든 염려는 물러가고 영혼을 위한 염려, 내가 복음을 전해야할 영혼들에 대한 염려, 그리고 내가 인도한 영혼들에 대한 염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에 대한 깊은 염려, 이것이 늘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영혼을 직접 맡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위해 간구하지 않음으로 그 영혼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자신들의 마음속에서는 주님의 이름이 잊혀집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가시가 돋아나고 그 가시와 잇닿은 쓴 뿌리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각양 죄악 된 욕심들이 마음 밭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결실할 수 없는 악한 마음 밭이 되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게을러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그 영혼들의 곤궁함을 인해서 아파하는 것이 목자 된 자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사람의 필요를 다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의 손에 그 영혼들을 맡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눈물 흘리며 기도해도 그 영혼이 너무나 강퍅한 나머지 오랜 시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영영 안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영혼들을 위한 부담을 지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서라도 강퍅한 그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고 은혜 안에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목자 된 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IV.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 사명의 자리로 돌아감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고 기대를 갖고 말씀하시는 대목을 보며 우리는 아주 커다란 복음의 진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믿음에서 크게 미끄러져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 배신하기 전 그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그에게 주셨는데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래로 일평생 주님 한 분밖에 모르며 외길을 걷다가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일까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경우와 우리 신앙의 경험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시고 다시 한 번 그들이 자기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래 주어진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우리를 불러서 주 앞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우리 예수님의 참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생명도 바치고자 했던 사랑 받는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미끄러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미끄러졌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번 미끄러진 것으로 영원히 퇴장시키시지 아니하시고 그를 다시 돌이키게 하셔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준 그 베드로가 잠시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들을 위해 주님처럼 기도하고 주님처럼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해나가지 못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잘못 살았지만 이제는 돌이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 그 영혼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잠시 후에 당신을 배반해버릴 베드로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그를 위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고, 미끄러진 영혼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와 형제들을 섬길 것을 기대하시며 오히려 기뻐하실 것을 보여주셨음을 생각하며 우리 주님의 모본을 따르는 무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랑을 베풀고 그 영혼을 위해 마음껏 수고하면서도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실망하지 않는 태도를 우리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생명처럼 사랑했던 제자, 그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맏이였던 제자 베드로가 잠시 후에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 그것이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기도의 마음을 흩트려 놓지는 못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오죽 심령이 강퍅하고 든 것이 없으면 사단이 너를 흔들겠느냐’고 말씀하시는 대신 그렇게 그 영혼이 위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그들을 위해 기도로 섬겨야 한다고 하는 책임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오늘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은혜를 받아서 지금도 예수님의 기도 덕택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정말 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 모두 이런 주님의 섬김의 빛 앞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노출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은혜를 모르고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혼들의 이름까지라도 부르면서 그 영혼들이 돌이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발자취입니다.


김남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