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목적, 하나님 자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I. 들어가는 말
천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좀 이기적이지 않나?, 하나님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이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창조에 관한 교리들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매우 얄팍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II. 하나님과 천지창조
그렇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는데, 철학적으로 논쟁이 되는 중요한 이치 가운데 하나인 ‘존재론’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계속 흐르는 양태인가?’ 라는 것에 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철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존재에 관한 고민이 한꺼번에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통해 ‘존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으면서 또한 한없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A. 창조 : 충만한 신성의 발로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고정된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자신 안에 가만히 가지고 있기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또 흘러나온 그것이 끊임없이 역사해서 사람들이 그 흘러나온 것을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충만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신데, 그 충만한 신성을 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이 ‘창조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수많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이 깃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창조된 사물들을 보며 그 안에 충만하게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창조하신 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창조세계를 통치하고 보존하시고,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기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속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창조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므로 창조세계가 원래 드러내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신성의 영광의 광채를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인간의 눈도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여주어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피조물들 안에 남아 있어 인간들은 때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보며 감탄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 창조세계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웠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창조의 찬란한 영광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의도였습니다.
B. 세계 : 충만한 신성으로 연결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가 충만한 신성으로 서로 연결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두 연결되어서 하나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모두 엮어있으므로 원래 창조세계는 모두 형제자매, 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연결이 죄가 들어와서 모두 깨뜨려져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결과 아담, 하와, 뱀뿐만이 아니라 온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부터 나기 때문에 땅을 저주했다는 말은 모든 존재의 기반을 하나님이 저주하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피조세계에서 가족처럼 하나로 연결된 원래의 아름다운 관계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잔인한 관계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오히려 공격받으며 살아야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이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질서를 인간을 위해 남겨두시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된 가운데 일어날 피조세계의 놀라운 하모니의 회복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물지 않고 사자와 함께 뒹굴면서 노는 그런 때가 온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피조세계가 그렇게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의도 : 피조세계를 통해 신성을 드러내심, 영광
결국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 자신 안에 고정된 충만한 신성을 창조행위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내시고, 그것들 속에 자신의 신성이 깃들어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묶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없는 피조세계를 생각할 수 없도록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 세계의 목적이 되신다’고 할 때, 이것은 ‘모든 피조세계를 당신의 창조의 능력 안에서 끌어안으신 그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세계 안에 인간을 두셨는데, 인간의 다스림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로 성경은 “그러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충만한 당신의 신성이 나타나 있었지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가에 따라서 그 충만함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이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십니다.
III. 창조의 목적이 곧 선의 궁극적인 목적
이제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는데, 선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선은 창조세계의 통합적인 질서 속에서 창조의 모든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선이 아니라, 나 자신이나 가족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너무 잘해서 많은 존경과 신망을 얻지만 나만 만나면 괴롭힌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선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 선과 선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선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선이 될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들은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질서에서 볼 때, 선의 개념과 맞을 수도 있지만 맞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부, 나 자신의 행복, 내 일부의 집단, 내 나라, 내 민족,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이런 것들에 맞추어서 선이라고 하는 잣대를 마련하게 되면,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선을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중요한 도덕적인 결론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창조세계가 모두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통합적으로 창조되어 모두 하나로 묶여져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묶고 있는 우주의 궁극적인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A. 궁극적인 선(善)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선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 “토브”라고 하는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인 곳은 공교롭게도 창세기 1장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인간까지 창조가 이루어지는 동안 하나님께서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좋았더라”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것은 “선했더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좋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다고 할 때, 내가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설계도를 그립니다. 그리고 원래 의도했던 대로 충분히 성취했을 때 만족해하며 “좋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토브”, “선하다” 입니다.
하나님도 당신 자신 안에 고정되어 있는 이 충만한 신성을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밖으로 끌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창조된 그 피조물들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이 깃들어서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세계 사이에 놀라운 전체적인 일치가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속에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깃들이신 결과가 영광입니다. 창조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보시며 하나님 자신다운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내 의도대로 되었고, 나다운 것들이 창조되었고, 내가 원래 이것들을 존재하게 하고자 했던 그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도덕적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선의 기준은 항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래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B. 인간과 선(善)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게 되면서 이 ‘선한 상태’가 깨트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찬란한 창조의 신성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의 눈이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선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됩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을 괴로워하며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해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며 자신이 모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판단자가 되어 각자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인간을 두셨던 원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므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이 무엇인가 할 때 그 답은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과 모든 피조세계가 창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선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도덕입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선을 행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사실 이런 선을 행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창조의 원래 목적에 거의 이탈되어버린 피조세계와 다른 인간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 또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창조의 목적에서 한번 이탈된 인간은 결코 그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러한 삶을 살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은 선하게 살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 구속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구속의 사건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구속을 통한 영혼의 재창조는 놀라운 유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고 예수를 믿게 만드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망가져버린 그 사람의 영혼을 중생이라는 방법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망가진 인간의 내면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고, 새 사람, 새 하나님의 본성을 입게 된 것 자체가 창조사역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영혼 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만물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후,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을 흘려내어 창조세계를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흘러나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다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으로 인해 끊어졌던 피조물과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작은 세계에서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시 영적 연합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자신이 속한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함께 하나로 묶어놓으신 연결이 이루어지고, 멀리로는 하늘에 이름이 있는 성도들과도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의 머리에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그 연합이 다시 확대되어 모든 피조물들과 연결 관계가 회복되어 죄가 들어오기 전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때 나타날 영광을 미리 조금 맞보면서 살게 하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속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재창조 하셔서 우리를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해주셨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속해주신 계획을 따라 사는 일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완전히 없애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셔서 죄로 인해 창조의 목적으로 더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수단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 죄에 관한 모든 교리들을 터득하고 죄와 싸우는데, 이치는 알지만 죄가 죽지 않아 너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안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계속 죄를 선택해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즉, 죄를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있어도 자신이 죄를 선택하면 그 방법을 아는 것이 죄를 죽이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과 무한함, 하나님의 이 장엄한 창조의 목적과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한순간에 그 죄를 버릴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관심사의 전환이 생겨나게 되어 죄가 죽은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이 장엄한 창조세계와 그의 영광에 대한 묵상,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떻게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야지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들이 함께 감화로 역사할 때 우리는 넉넉히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선이 무엇입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다른 것들을 그렇게 돌아가도록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IV. 하나님의 개별적인 명령 : 창조의 목적을 보여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별적인 명령(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지시하시고 행하라고 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비롯한 모든 창조세계가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이라는 것은 결국 개별적으로 볼 때 맡겨주신 사명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여 창조의 원래 위치(사명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구속하시고, 구속을 기초로 은혜까지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는 혹시 돌이켜서 인생에 남은 얼마큼이라도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여 살기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시급한 것은 원래 창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을 때 내게 주셨던 내 존재의 목적이 선인데, 그것을 내 존재의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하며 살다가 회개 할 때 후회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후회와 고통의 실체는 다름 아닌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부터 이탈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한 후회와 고통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떠오릅니다. 그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버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데리고 가고자 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실한 소원이 있는 마음에 항상 예수님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창조의 선한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로 돌아가지 않고 그 목적에서 이탈해 자기를 모든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비참한 죽으심 뒤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뒤에는 어찌하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려놓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죄를 누르고 충분히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V. 영광 돌리는 삶 : 소유나 지위의 문제가 아님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엄청나게 자신을 희생해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많이 희생하면 좋은 신앙생활이 되고 조금 희생하면 조금 부족한 신앙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창조의 교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손해를 보고 안 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복을 하나님으로 모두 묶여져 있는 질서 안에 원래 인간이 있던 자리에서 부여받을 수 있는 행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관계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를 하나님처럼 신격화하고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것들을 빼앗아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들은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사람들 중에 모두 가난하고 비굴하게 살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왕도 참된 신앙을 가지면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제왕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누리며,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서 사는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누리고 있을 그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과 그가 자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소유물들은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자리가 어디 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 그 자리에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영광을 받으시며, 그 안에서 신자들도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 시간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감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얼마나 한없이 행복할 수 있는지, 그러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얼마나 한없이 영광을 받길 갈망하고 계시는지를 너무나 모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는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그 일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끊임없이 성화됨으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할 필요성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주 넘어지게 하고 범죄 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잠시 벗어나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고 우리의 존재는 이 땅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만 못하고 벌레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단 한 번의 유일한 기회이고 빨리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남은 인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 목적을 빚나가서 살아가며 맞보는 모든 육체의 즐거움과 정욕의 만족은 들에 핀 풀잎에 매달린 꽃과 같고 꽃은 마르고 풀은 시듭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행복은 영원합니다.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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