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지 휫필드

18세기의 뛰어난 순회 설교자 조지 휫필드 / 찰스 웨슬리

새벽지기1 2016. 6. 14. 12:43


18세기의 뛰어난 순회 설교자 조지 휫필드


"오직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고요한 영으로 단장할지니, 그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요한 웨슬리의 동생이며, 동역자인 나 찰스 웨슬리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귀한 친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주님의 곁으로 보내면서, 그를 위해 537행의 시로 내 마음을 달래면서도 이렇게 다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진리를 찾아 학문의 숲에서 배회하던 휫필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겸손한 청년이었고, 내 눈에는 가식도 술책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천사와도 같이 비쳤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 우리는 함께 열성을 다해 종교적인 선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우리의 열심으로 그분께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스무 살(1735년) 때 그가 우리 형제보다 먼저 회심하여 구원받게 되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길과 산기슭으로 가서 강권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과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얼마나 깊이 염려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목회는 한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교회를 이끌도록 하지 말아 주실 것을 수도 없이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나는 교만에 들뜰 것이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포드를 떠나 있던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목자로서 글로스터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후, 그에게는 설교해 달라는 초청이 여러 곳으로부터 쇄도했고,

초청받는 곳곳에서 그는 거듭남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어떤 이들은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서,

교회의 함석 지붕으로 기어올라가서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교회 전체가 사람들이 내뿜는 숨결로 후끈 달아올라 기둥들에서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듯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졌다.

설교자가 설교단으로 걸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운집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휫필드가 세례받은 신자들에게까지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했으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지아에서 돌아온 휫필드는 교회들에서 거부당하고 밀려냄을 당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그들을 위해 휫필드는 창조적인 방식,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야외 설교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생에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는 광부들에게로 갔다.

브리스톨 부근의 킹스우드(Kingswood)의 한 얕은 언덕 위에 휫필드가 섰을 때, 그의 주위에는 새까만 얼굴의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바로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나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여러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 언덕에 서서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설교를 듣던 그들의 새까만 두 볼에는 어느 새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씀을 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 나무와 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서서 뇌성과도 같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런던, 무어필드, 케닝턴 등 영국 각 지방과 새로운 개척지 미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의 목자를 대신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녔다. 그 길이 광야든, 험한 바다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그저 안락한 곳에 앉아서 태만하게 죄인들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18,000회의 공중집회를 이끌었다.

 

"이 세대의 자칭 의인들이 그들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간주하기에,

나는 길과 산기슭으로 나가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강권하여 내 주님의 집이 채워지게 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설교자로서의 휫필드는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거의 무한정의 "인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청중들의 환호와 호의와 박수갈채는 갈수록 커졌으며, 심지어 그를 천사로까지 불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 휫필드는 자신을 파멸시킬 용광로의 뜨거운 불 사이로 걷는 자처럼 두렵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찬사가 헛된 것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 웨슬리 형제들도 설교자로서 동일한 유혹과 죄의 공격을 받아 왔기에, 설교자로서의 사역이 기쁨과 동시에 더욱 큰 영적 싸움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고 말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 버릴 심판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 W.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모든 사람의 종으로 있게 하라"

 

휫필드는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섬겼다.

킹스우드의 광부들, 더머(Dummer)에서 만났던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미국의 흑인 노예들,

미국의 프랭클린이나 벨쳐, 영국의 볼링브로크나 체스터필드, 그리고 학식 있고 위엄 있는 일단의 귀족들까지...

그 섬김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생명의 위협과 폭력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위협들은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기간 내내 휫필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웨슬리)의 사람들, 해리스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과 모라비안들도 감당해야 했던 수난이었다.

휫필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으려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주겠다고도 제안했으나, 그는 영광 중에 안식하기까지는 안식할 생각이 없었다.

"이생에서 나는 영원한 갈등과 고난을 찾을 뿐이며,

내가 영원 세상의 이편에 있는 동안 십자가 외의 다른 어떤 평화도 소망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도 속박하려 하지 않았으며, 교단을 결성하지도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끝까지 그를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려 했지만,

그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남고자 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다.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 휫필드는 1770년 9월 29일 주일, 북 아메리카 뉴베리 포트에서 55살의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여러 해를 계속해서 보통 40시간, 곧잘 한 주에 60시간씩, 수천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30여 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그토록 무거운 짐을 졌던 그였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의 반대를 이겨내야 하고, 모든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바람불고 비 오는 험악한 날씨에도 한두 시간씩 설교를 강행했던 그는 늘 피곤과 싸워 이겨야 했다.

미국 남부의 더운 날씨에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때때로 그는 더위와 피로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할 책임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소생시키곤 했다.

격심한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시간이 되면,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해지곤 했다.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데 걸린 시간과 중간 중간에 잠깐씩 휴식을 취하거나 그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제한다면, 그의 전 생애는 계속 이어지는, 거의 중단 없이 설교로 소진된 삶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생에 동안 미국을 일곱 번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에 열 다섯 번, 아일랜드에 두 번, 지브롤터와 버뮤다와 네덜란드에 각각 한 번씩 갔다.

더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에까지 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교회들의 신앙은 퇴색해 가고, 교회 안에는 형식적인 신자들 투성이었다.

아무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주님 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들로 산으로 나선 것이었다.

 

잃어버린 바 된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라.

그들의 눈이 감겨진 채로, 그들의 귀는 거짓말에 속은 채로,

그들의 양심은 부패하고 더러워져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다.

누군가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쌍하고 가련한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영적으로 시들어 버린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을 염두에 두라.

주님의 편에서는 그들의 영적인 잠을 깨워 진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도전을 줄 자들이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