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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새벽지기1 2016. 6. 13. 15:42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홀리클럽에 멤버였고 설교에 있어서는 존 웨슬리도 따라 가지 못한 그 유명한 조지 휫필드
대부분에 사람들은 웨슬리 목사님은 잘 알아도 휫필드라는 이름은 생소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웨슬리 못지 않게 그시대에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고 영국사회와 미국의 부흥을 일으킨 주역이었습니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감리교 창시자가 존 웨슬리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휫필드가 만들었지만
신학의 견해차이로 완강했던 웨슬리와 함께 가지 못하였고 그의 말처럼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며 웨슬리에게 넘겨 주었다고 합니다.  
웨슬리가 5년 동안 순회전도를 했었는데 그 계기는 휫필드에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순회전도를 하게 되었고 야외설교도 휫필드가 먼저 시작하여 웨슬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공통점이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두명 다 과부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두명다 "탁월한 야외설교자" 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야외설교를 할 때는 교통편이 어려웠던 그 시대에 많게는 1만명~8만명까지 모여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설곳을 달라 지구를 흔들어 보이겠다."고 외쳤고 그영향은 실로 지구를 흔들게 되었습니다.

 

죠지 휫필드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는 "가장 위대한 설교가요 연사"라고 말하였습니다.
휫필드는 1714년 12월 16 일 영국의 글로우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부친은 세상을 일찍 떠났고

그는 가난한 여인숙을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는데 "거짓말을 좋아하고, 욕설 및 하찮은 농담을 잘하며, 안식일을 범하며 극장에 드나들고 카드 놀 이를 좋아하고, 연애 이야기 읽는"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시립중학교에 무상으로 진학하여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웅변술도 읽혔다(Ryle 15). 18세가 되면서 옥스포드 대학교의 펨브로그 대학에 근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입학한 후 웨슬레 형제가 1729년 "홀리클럽"을 결성하여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고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고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홀리 클럽의 멤버로 그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찰스 웨슬리가 준 책 한 권을 접하게 되고
헨리스쿠갈의 "인간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통하여 회심하였습니다.

웨슬리를 만나며 엄격한 종교 계율과 성경읽기, 기도, 그리고 경건한 청교도들의 서적들을 읽으며 Holy Club 멤버중 가장 먼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견고하게 붙잡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카스타누자(Castanuza)의 "영적 투쟁"(Spiritual Combat)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스 쿠갈(Scougal)을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윌리엄로(William Law)의 "진지한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알린(Allein)의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경 고"(Alarm to Unconverted Sinners)등을 읽으면서 영적인 무지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1736년 그는 22세의 나이로 성직에 임직하였고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옥스포드에 가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런던의 여러 교회를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737년 요한 웨슬리가 신대륙의 죠지아에 있는 사바나(Savannah)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모금 운동을 위하여 휫필드에 동행할 것을 요청하므로 잠시 미국에 다녀오게 됩니다.

휫필드는 1738년 죠지아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명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강단을 부탁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그는 1739년 2월 부터 브리스톨 근교의 킹스우드(K- ingswood)에서 소외된 광부들을 위한 옥외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두달 뒤, 그는 런던으로 가서 그의 친구의 교회당에서 설교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설교를 방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교회당 밖에서 설교하여야 했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국 야외집회를 보편화 시켰습니다. 야외 집회는 새로운 운동이 되었고,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강단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 그는 무어필즈(Moorfields)에서 3만명의 사람에게 설교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집회는 18,000번에 달하 게 되었습니다 (Ryle 26). 그는 겨울철이면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런던에서 정규적인 목회를 하였는데 그의 주간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주일 아침 6시30 분에는 수백명의 신자들에게 성찬을 베풀고, 주기도를 낭독하였습니다. 아침과 오후에 설교를 하고, 다시 5시 30분이면 설교를 했고, 그 뒤에는 남아있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강론을 함으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아침 6시에는 설교를 했고, 월요일, 화요 일, 수요일, 목요일 토요일 저녁에는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 역시 괄목할 만한데. 그는 스코틀랜드를 14회나 방문하였고 대서양을 13번이나 건넜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대서양을 횡단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1/3을 미국에서 보내었는 데, 미국에 머무는 동안 전도여행과 죠지아의 사바나에 있는 고아원을 돌아보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는 여행으로 늘 지쳐 있었고, 매주 13 개의 설교를 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한 설교는 약 12,000개나 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그의 설교는 약 75개 정도됩니다. 벤쟈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나는 그를 30년 이상이나 가깝게 알고 지냈다. 모든 선한 사업을 집행하여 가는 가운데 그는 순수함, 사욕 없음,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감리교도 (Calvinistic Methodist)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휫필드의 칼빈주의적인 설교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복음적인 대각성은 휫필드와 웨슬리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옥스포드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을 만들어 신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예정론과 구속의 범위에 관한 견해, 차이로 갈라서게 됩니다. 웨슬리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 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보편속죄설을 주장하므로 알미니안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휫필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신앙적인 차이로 1741년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휫필드는 한 때 웨슬리가 천국에 올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두사람의 신학이 다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움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휫필드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타협하지 않았으나, 인간적으로 화해하였고 웨슬리는 휫필드의 장례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한번은 냉담하고 권위적이던 체스터필드(Chesterfield 1694-1774)경이 청 중속에 앉아 있었는데 휫필드는 그때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가련한 상황을 눈먼 거지를 통해 예증하였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신을 인도하던 개를 잃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밤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청중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조용하여졌습니다. 눈먼 거지가 죽음의 벼랑에 떨어져 내리게 되는 순간, 체 수터필드 경이 벌떡 일어나 그 거지를 구하려고 달려 나가며 큰 소리 로 `그가 떨어진다, 그가 떨어진다`고 부르짖었다.(Ryle 40-41) 또한 휫필드가 침몰하는 배를 묘사할 때 사람들은 생명선으로 옮겨 타려고 그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할 정도였다.(Adams 119).  설교에 있어서 진지하였다. 그는 사자처럼 설교하였다. 거룩한 격렬함이 있었으므로 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열정과 연민으로 가득하였고 그의 말년에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던 코넬니우스 윈터(cornelius Winter)는 말하기를` "그는 설교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끝낸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그의 열정적인 기도의 덕분이었습니다.(Demaray 211 -212) 그는 불신자에게 설교하면서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당신을 위하여 감옥에도 죽는데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 없이는 천국에 혼자 가고 싶지 않습니다.(Demaray 212-213). 설교의 영향에 라일은 말하기를 "그가 34년 동안 청중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자기의 영향력을 유지한 설교자는 일찌기 없었다. 그의 인기는 수그러드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설교를 시작했던 날과 죽는 날이 같았다"고 합니다. (Ryle 37)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참으로 신기한 일은 그의 설교를 듣자마자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생활 자세가 급속히 변하는 것이다.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관심하던 세상이 온통 종교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휫필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미국에서 대부흥을 일으킵니다.
하바드와 뉴헤븐(예일)대학에서도 설교를 했는데, 몇 주 후 콜렌박사는 하바드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학생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다. 정말 거듭난 것 같아 보이는 학생들도 많다. 기도와 찬양소리가 학생들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날 설교를 들은 백여명의 학생 중 일곱명만 아무 감동도 못 받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일대학에 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뉴 헤븐에서의 각성 분위기는 한동안 매우 크고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다. 대학당국은 이 일에 한몫 끼지도 못했다.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아주 진지해졌고 주목할 만한 정도로 달라진 학생들도 많았다. 휫필드의 설교는 그 대학의 많은 학생에게 행복하고도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휫필드를 적대시했던 사람중의 하나인 영국인은 1756년에 쓴 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휫필드 씨에게는 십만명가량의 추총자가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설교를 듣기 전에는 지독히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요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자 왕의 충직한 신민들이 되었다고 한다. 웨슬리씨의 설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들 한다.....' 라고.

휫필드는 감리교의 수장자리를 맡게될 기회를 가졌으나 스스로 포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감리교 수장자리를 포기하면 휫필드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라고 말하자

 

그때 그는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 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생략...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심판 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 W.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 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라는 말을 남김으로 수장의 자리를 포기했고 그 결과 감리교회 창시자는 요한 웨슬러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처럼 그의 전 삶을 대변하는 메시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1770년9월29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휫필드는 보스톤으로 가는 중에 엑서터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한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보다는 침대로 가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러자 휫필드는 '맞습니다. 노인양반'이라고 말하고는 얼굴을 돌려 하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여,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가서 당신을 위해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에 가게 하옵소서'


휫필드는 여기서 55세의 나이에 소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죽기 전날 밤까지 힘든 몸임에도 2시간의 야외 설교를 감당했고, 그 피곤한 몸으로 여관에 돌아와서도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촛불이 다 탈 때까지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밤 그는 지병인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였고, 그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정말 그는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그의 전 몸을 불살라 드림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을 아는 찰스 스펄전은 그리스도 다음으로 휫필드를 따른다고까지 고백하였고 또한 라일은 18세기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기술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를 먼저 다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휫필드를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자료는 그의 사역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