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악한 자를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죄인들을 의롭다하기 위함이다, 그 죄인이 열심당원이든지 세리든지 상관하지 않고서 말이다”[J. Moltmann, The Crucified God (New York: Harper, 1974), 142]. 따라서 모든 형태의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 사역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창조 질서에서 폭력을 일소하고 샬롬(평화)의 세계를 세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전제한다. 신적 폭력은 인간의 폭력에 대한 응답이다. 이런 점에서 폭력이 정당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힘과 권력은 그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질서에 속한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에 써야 한다. 그 뜻은 다름 아닌 억압 받고 있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면 그 구성원에게 폭력으로 나타난다. 공정사회는 사람이 갖는 기본권이 인정되는 제도를 갖는다.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다는 것이 모든 사회 제도에 바탕을 이룬다.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이 인정되지 않을 때 하나가 되는 공동체 정신이 발휘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극심한 차별과 갈등 및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끝내 폭력에 이른다. 기본권이 인정되려면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질서는 사람이 가진 기본권을 지키는 길이다. 법질서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환경이자 기반이다. 공정한 사회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기 몫을 나눠 가질 수 있게 하는 법질서가 확립된 공동체다.
이제부터 하나님 형상을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핀다. 초기 교회를 이끌었던 교부들 가운데 하나님 형상에 관해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주후 130년경에 태어난 이레니우스(Irenaeus)다. 그가 쓴 첫 글은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이다. 사도 바울이 죽자 영지주의 가르침이 교회를 크게 공격하였다.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마르시온(Marcion)은 다 같이 주장하기를,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처음으로 계시된 초월적이고 은폐된 하나님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 형상에 관한 교리는 자연스럽게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처음에 인류를 그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신 똑 같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인류를 또한 완전하게 만드실 분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 곧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에 대한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 모양은 아담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 먹었을 때 잃어버렸으나, 하나님 형상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남아 있다. “이단 논박” V, 6, 1에서 이레니우스는 사람이 가진 혼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구원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만일 혼에 영이 없으면, 그러한 사람은 동물적 본성을 가지고 있고, 육체에 속하며, 불완전한 존재가 될 것이고, 지음 받을 때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영을 통해 하나님과 비슷한 모양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따라서 불완전한 존재이다.’
여기서 ‘동물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류 최초가 타락한 후의 본래적 모습이고 여전히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완전하게 되고 타락했을 때 잃어버린 하나님 모양을 가지려면 영의 특별한 선물이 필요하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좋은 말씀 > 신현수: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42) (0) | 2016.05.26 |
---|---|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40) (0) | 2016.05.24 |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8) (0) | 2016.05.21 |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7) (0) | 2016.05.20 |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6) (0) | 201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