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산다.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서신에 등장하는 말이다. 20세기 신학사에 뜨거운 논쟁을 촉발시킨 경건하면서도 불경스러운 언사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라는 도발적인 발상이 1960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세속 신학(Secular Theology)의 영감을 제공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세속화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인 사신신학(God- is- dead theology)에서는 본회퍼의 말이 무신론적인 개념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본회퍼가 세속화 신학과 사신 신학의 원조라는 누명을 쓰기도 한다.
옥중에서 쓴 파편적인 글에 담긴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의 말이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숙한 신앙으로의 도약을 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그가 외쳤던 제자도의 삶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다. 하나님의 일식(eclipse of God) 현상이라도 일어난 듯이 하나님이 도무지 안 계신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계셔도 세상사에 전혀 개입하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성숙한 신앙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 일게다.
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히틀러가 온 유럽을 잿더미로 만들고 6백만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데 교회는 어용 아니면 보신주의로 일관하며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쥐 죽은 듯 침묵하는 요지경의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어린양 예수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결연하고 비장한 의지가 담긴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미친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되 결국 하나님의 도움이 완전히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것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꿋꿋이 주님을 따라야 함을 반어적으로 역설한 것이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점점 죽음의 족쇄가 그를 조여 옴을 느끼며 그런 각오를 되뇌었으리라.
하나님께 저주 받으신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아야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매일 직면하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배교의 길을 걷기 쉽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사인과 증거로 가득한 세상에서나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신자는 불의가 횡행하고 악이 난무함을 침묵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고 나를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더욱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특별히 암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절실하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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