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회자되고 있는 구원 이야기를 뜯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문제는 구원에 창조가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소박하게 믿고 있는 구원이란 대충 이렇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살아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받고, 죽어서는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정도입니다. 여기에 하나라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살아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도 복을 받는데, 살아서 받는 복은 부귀와 영화이고, 죽어서 받는 복은 육체를 빠져 나온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어떻게 됩니까? 이내 곧 썩어 없어집니다. 육체는 흙무덤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죽고 나면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도 이와 같은 구원관을 부채질하는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진 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장밋빛 기대를 합니다. 미래의 어느 때인가는 지상의 모든 문제가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낙관합니다. 둘째로 세상은 갈수록 부패해질 것이고, 결국은 파멸한 것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죄로 인해 저주받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저주받은 곳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어떤 기대나 미련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끊고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두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두 번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저주받은 곳이요 멸망 받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현재의 물질세계가 다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세계는 불타 없어지고 영적인 세계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구원이 바로 이런 구원입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구원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 이런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이런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성경은 창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구원 이야기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반대입니다. 창조가 구원 이야기의 토대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창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구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창조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거입니다. 성경은 창조 없는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원 없는 창조도 말하지 않지만 창조 없는 구원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조를 구원의 토대로서 말하고, 구원을 창조의 완성으로서 말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구원의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하늘에 있는 것들뿐 아니라 땅에 있는 것들도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명한 부활 이야기(고전15장)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목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만유의 주인으로 존재하십니다. 만유의 주인으로서 만유를 다스리기 위해 만유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통치하는 미래의 세계상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땐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이사야11:3-9). 온갖 동물들이 메시아의 세계에서 함께 뛰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이지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6:8-15). 무슨 말씀입니까? 땅이 멸망해야 할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나라가 그분과 함께 이미 이 땅에 임했다고 말씀했습니다(막1:15).
요한은 묵시록 마지막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고 말함으로써 현재의 세상이 멸하여진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만, 실제적인 선포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는 게 아니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였습니다. 또 마지막 약속도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말씀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파멸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오직 세상의 구원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세상을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파멸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동안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세상은 불타 없어진다고 말해왔습니다. 심판과 파멸의 대상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 때문에 빚어진 왜곡입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불변하는 ‘형상’으로서의 세계와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질료’로서의 세계로 나누어 이해했습니다. 그는 ‘형상’인 본질의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영의 세계, 어둠과 흔들림이 없는 이상적인 세계(IDEA)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세계인 ‘질료’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열등하고 악한 세계, ‘형상’의 그림자에 불과한 변화무쌍의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 복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삶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면 플라톤의 이원론이 상당히 그럴듯해 보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죽으면 몸은 곧 썩어 없어집니다.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영혼만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기초해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구원을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확대되어서 구원은 ‘시간-공간-물질로 구성된 현실로부터 해방되는 것,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점차 이런 것이 구원이라고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도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일원론에 근거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입니다(엡1:10).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피조세계를 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물질로부터 영혼을 구하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분리된 물질과 영혼, 하늘과 땅이 다시금 하나로 통일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창조는 구원의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에 창조와 구원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창조와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한 묶음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원론이 기독교 안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2세기 때 일입니다. 2세기에 교회는 정치 문화적으로 그리스-로마의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자연히 교회는 그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변증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철학인 플라톤의 철학 방식을 차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철학적 토대인 이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인 삼단논법을 기독교 변증의 방법론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론도 이원론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되었고, 천국은 물질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들어가는 영적인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구원론에 플라톤의 이원론이 들어오자 창조는 구원에서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구원받는 생각, 우주 전체가 구원에 참여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개나 고양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지렁이나 달팽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나무나 물이나 돌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해나 달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안 해 보셨을 겁니다. ‘구원은 인간이나 받는 것이지 개나 고양이가 무슨 구원을 받는가?’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우주적인 구원이 영혼의 구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구원론이 이원론에 갇히게 되면서 구원이 오늘의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 영혼의 문제일뿐이지 오늘 내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땅의 삶이 어떻게 구원과 연결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굳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부귀영화를 누리면 되고, 구원은 예수를 통해 보험을 들어놨으니 죽고 난 이후에 받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설사 천국이 지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나 존재할 뿐이지 오늘의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구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이유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다 구원론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구원론이 플라톤의 이원론에 갇혀있어서 창조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 땅의 현실이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플라톤의 세계관과 성경의 세계관은 전혀 다릅니다. 플라톤은 하늘과 땅의 분리를 말하지만 성경은 하늘과 땅의 통일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땅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지만 성경은 땅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목표하시는 바도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엡1:10).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운명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듯이 하늘과 땅도 그렇습니다. 하늘 없이 땅 없고, 땅 없이 하늘 없습니다. 땅 없는 하늘, 그런 세계는 없습니다. 지금은 하늘과 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다 같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그동안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이 다시금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조화와 평화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하늘과 땅 또한 한 몸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표현이 한 번 나오기는 합니다만(창6:5-6),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돌보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온전히 구원을 받습니다. 정치 질서, 경제 질서를 비롯해서 사회 시스템 전체, 또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다 구원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세계가 어떠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서 마지막 덮개가 벗겨질 때에 무엇이 드러날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하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의 사람들과 과거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의 사람들, 조상들과 후손들, 현명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 압제자들과 압제를 당했던 자들, 살해한 자들과 살해된 자들, 동양인들과 서양인들, 독일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정통주의자들과 이단자들,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 루터교 신자들과 개혁교회 신자들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봉인된 모든 책이 열릴 때에 우리가 어떻게 분리되고 연합될지, 어떻게 만나고 헤어질지, 어떻게 놀라게 될지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계속 살아갈 질서정연한 자연이 어떻게 변할지, 우리가 지금 보고 있고 알고 있는 별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산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지, 무엇을 의미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칼 바르트의 신학묵상).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 모든 것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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