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앎과 모름의 역설(2)

새벽지기1 2015. 11. 28. 10:03

앞글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뭘 아는 줄 생각하는 자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바울의 일침을 전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지식 무용론으로 끌어가면 안 된다.

바울이 지식 무용론을 펴기라도 한 것인 양,

신앙인은 모름지기 몰지성의 길이나 반지성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인 양 오해하면 안 된다.

다 아는 대로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스승 밑에서 최고의 학문을 갈고 닦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지식이 없는 신앙,

전통과 열정과 확신만 넘치는 신앙이 얼마나 무모하며 위험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른다고 자부했던 조상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헛된 우상에게로 돌아갔는지,

얼마나 쉽게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를 가려왔는지,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앎에 기초하여 바울은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말하기까지 했다.

옳다.

바울은 지식의 토대가 없는 신앙적 확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바울이 지식 무용론을 주창했을 리 있겠는가?

지식을 부정하는 믿음 지상주의자였을 리 있겠는가? 말이 안 된다.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은혜와 구원의 풍성함을 알게 해달라고 중보기도를 했다(엡1:16-19).

그리스도인은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 했고(골3:10),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다(빌3:8).

 

  진실로 그렇다.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신앙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다.

지식은 신앙이 아니며, 지식으로는 결코 신앙에 이를 수 없다.

때로는 지식이 신앙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참되고 풍성한 신앙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강한 지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실 신앙만 그런 건 아니다. 삶에도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충분한 법 지식을 갖추지 못한 법관의 판결,

몸의 구조와 생리 그리고 첨단의학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의사의 치료,

아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선생님의 교육을 생각해보라.

생각하기만 해도 겁이 덜컥 나는 위험천만한 일이지 않은가.

자고로 올바른 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법 지식을 알아야 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명의가 되기 위해서는 인체의 신비를 알아야 하고,

훌륭한 목수가 되기 위해서는 나무의 성질을 알아야 하고,

탁월한 자동차 수리공이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내부 구조를 샅샅이 알아야 한다.

지식이 성공의 발판이라서가 아니다. 지식이 미래를 보장하고 좋은 직장을 제공하기 때문에도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식은 삶이 아니며, 지식으로는 결코 삶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참되고 풍성한 삶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강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간은 지식 없이 살 수 없다.

비록 지식의 나무(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지식 없이는 살 수 없다. 아니, 지식은 매우 유익한 삶의 필수 요소다.

무릇 참된 지식은 헛된 우상과 쓸데없는 얽매임에서 자유하게 해주고,

눈앞의 세상사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어리석은 전통과 왜곡된 권위에 항거할 수 있는 힘과 용기의 근원이 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어내는 지혜의 단초가 되기도 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섬김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바른 지식에 눈떠가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은 없다.

진실에 영혼을 쏟으며 공부하는 마음과 삶처럼 싱싱한 젊음은 없다.

참으로 그렇다. 지식은 우리 모두의 삶과 영혼을 풍성하게 살찌우는 아름답고 복된 삶의 동반자다.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진실을 말했다. 지식의 유익과 복됨을 거듭거듭 일깨웠다.

하지만 지식의 유익과 복됨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뭘 아는 줄 생각하는 자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도 함께 전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정말 알아야 할 것’이란 과연 뭘까?

그린도전서의 맥락을 참고하면 ‘사랑’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앎’이라는 좀 더 직접적인 맥락을 따라 읽으면 ‘모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모름’이라고 말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지식의 유익과 복됨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지식의 실용성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지식은 지식의 유익과 복됨을 넘어 지식의 절대적 한계를 인식하는 데까지, 즉 내가 아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절대적인 모름 앞에 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름을 알지 못하는 지식은 언제든지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폭력이 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편견과 아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모름입니다.’

 

옳다. ‘모름’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