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김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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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며, 현 총장 직무대행 김길성 박사가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현대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이를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는데 매우 유익하다고 하겠다. 이런 이유로 이 논문을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1. 서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교단 안팎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런 때에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 주제가 되는 사경회와 기도운동, 그리고 진정한 회개운동은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지향하며 대부흥운동의 참된 의미를 계승하고자 하는 뜻있는 사람들에게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본 논문은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부흥을 기다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과 여망을 담은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미래의 건전하고 바람직한 한국교회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조언으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종교개혁이래로 해묵은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 마틴 루터의 생애에 있어 이신칭의 교리의 발견은 그의 생애에 미친 영향뿐 아니라 그 자체가 종교개혁의 기치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면죄부 발행에 대항하여 95개조를 붙이고 이신칭의 교리를 주창하여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사람은 루터이지만 종교개혁의 깃발을 세우고 이신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와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오히려 요한 칼빈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성화 교리의 발전에 있어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다른 한 사람은 존 머리 교수이다. 아래에 요한 칼빈과 존 머리 교수를 중심한 성경적이고 신학적 성화 교리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일생에 걸친 성화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인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구원순서의 성경적 기초는 롬 8:30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이것은 예정의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택자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기에 성령의 사역은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구원의 단계는 소명으로부터 시작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혜택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적용되기 전에 이미 택한 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엡 1장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을 말한다. 그런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되어 진 예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는 소명부터 시작한다. 부르심부터 시작해서 칭의, 그리고 그 다음이 영화 단계이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 즉 영화는 그리스도 재림 때 이루어진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 단계는 구원 순서 전부가 아니다. 본문은 구원 순서를 말하는 다른 구절들과 함께 포괄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본문에서 말하는 세 단계는 구원 순서의 처음, 중간, 그리고 나중이라고 하는 구원 순서의 골격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성도의 성화의 완성을 말할 때 죽음의 순간, 직후를 말한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화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웨슬리 신학과 구별되는 점이다. 웨슬리는 완전 성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완전성화는 죄 짓지 않는 단계, 즉 죽음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는데 죄 있는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르지만 죽음 직후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거룩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조직신학의 고백이다.
한편 재림 때에 우리 몸이 변화되어서 몸과 영혼이 합해져 완전한 부활을 이루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는 신체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다. 주님 재림 때에 이뤄진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여 미래가 아니라 과거 동사를 썼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영화롭게 될 사람들이지만 중생의 순산에 하나님의 역사로 그 순간부터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 속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되돌이키지 않는다. 한 번 중생하면 되돌이키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몸과 영혼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은 재림 때이지만 하나님께서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 전에도 일부를 맛보고 사는 것이다.
흔히 성경신학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함께 이미 이 땅에 왔고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가 왕이시기에 그 나라 완성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셨다’는 과거사를 쓴 것은 완전한 성취가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신체의 변화가 중생의 순간부터 그 싹이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오히려 논리적 순서이다. 즉 구원 순서의 아홉 단계는 구원의 기쁨의 단계이지 각각 분리된 단계들이 아니다. 선배들의 이야기처럼 꿰어 놓은 구슬과 같다. 토막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벌콥의 「조직신학」에는 구원의 순서가 일곱 가지로 나온다. 수양과 영화가 없다. 박형룡 박사는 아홉 단계를 말하지만 벌콥은 일곱 단계 밖에 없다. 수양과 성도의 영화 부분이 없고 7단계로 끝난다.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요약해 놓은 것이 벌콥의 「조직신학」이다. 당시 바빙크를 집대성한 것으로 당대에 가장 나은 것이 벌콥의 책이다. 그리고 그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벌콥의 책을 대본으로 하고 구미 신학자들의 좋은 글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비추어 추려서 꽃을 꺾듯이 모아 놓은 것이 자신의 저술이라고 고(故) 박형룡 박사는 겸허하게 언급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단계를 9단계로 말하고 있다. 즉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를 말한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의 영역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하고 질문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목회자의 가슴 속에도 이런 질문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이것을 가슴에 담고 교인들을 가르치다보니 교인들도 목회자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이점에 대해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놓쳐서는 안된다. 구원론을 공부할 때 성령으로 이해 우리 속에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덕이 우리 속에 적용되어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때 우리 속에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면 구원론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서 비롯된 구원의 기쁨과 직결되어야 한다. 이 모든 적용사역이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 속에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 받은 구원의 감격, 구원의 기쁨에 대한 감사가 바르게 연결되어야 한다. 이 연결 작업에 있어 가장 가까운 것이 성경 외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3권인데 모두 25장으로 되어 있다.
2. 요한 칼빈(John Calvin)의 견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에 대해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자 칼빈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전 4권 80장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신론과 인론이 들어 있고 2권은 기독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택자들의 마음 속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3권이다. 4권은 교회론이다.
「기독교 강요」 3권은 전부 25장으로 되어 있다. 1-19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20장은 기도, 21-24장은 예정이다. 25장은 최종부활을 말한다. 「기독교 강요」 3권 6장부터 10장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칼빈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는 1539년판에서는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1559년 최종판에서는 구원론을 취급하는 현재의 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가 칼빈 신학의 전체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3권 6장은 전체 5절로 되어 있고, 1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근본적 삶의 원리를 말하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동기를 말한다. 3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주께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4절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말한다. 5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의 삶의 완성이 없으나 목표를 향해 필사의 노력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7장은 10절로 되어 있고 그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마디로 자기부인이라고 말한다. 8장은 11절로 되어 있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을 것을 말한다. 9장은 6절로 되어 있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흔들리지 않으며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할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세를 묵상할 것을 말한다. 10장은 6절로 되어 있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엄격함과 방종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은밀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이 3권 6장에서 10장에 걸쳐 말한 전체 주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날마다 죽고 사는(Mortification and Vivification) 체험이다.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요 현세에 최종 가치를 두지 않고 주님의 뒤를 좇아가는 삶이다.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주제를 구원의 순서와 더불어 논의해 보자. 구원의 순서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소명과 신앙-중생과 회심-성화-칭의-예정-부활의 순서이다. 여기서 칼빈은 소명과 신앙을 나누지 않는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하고 신앙은 사람의 응답을 말하는데 칼빈은 이 둘을 합쳐 놓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인 신앙 다음에 중생을 놓았다. 또 성화 다음에 칭의를 붙여 놓았는데 오늘날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문제가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훅스마는 칼빈이 우리의 잠재의식에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사역과 각성 의식에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을 구별하지 않은 때문에 모든 구원의 행복을 다 각성 의식적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객관적 사역과 성령을 통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않은 때문에 성화가 칭의보다 앞선 순서를 말한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칼빈은 잠재의식에서 되어지는 성령의 사역과 각성하시는 사역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훅스마의 지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카이퍼는 칼빈에 의한 구원의 순서는 신적 동작보다 인적 동작에 치중하여 주관적임을 면치 못하였다고 했다. 카이퍼의 이런 주장에 따르면 칼빈은 알미니안이 되고 만다. 이는 문제가 심각하다. 필자는 칼빈의 구원의 순서가 후대의 개혁파 학자들보다 성령의 역사의 역동적 면을 훨씬 더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칼빈의 넓은 의미에서 중생을 말한다. 그는 믿음을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이것만 해도 칼빈이 알미니안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말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믿음으로 어떻게 중생이 가능한가?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칼빈 이해에 있어 오늘날의 개념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까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일생동안 중생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작업이다. 중생은 죽고 사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죽고 사는 이 역사를 일생동안 계속한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첫 순산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죽은 자의 마음에 새 생명의 씨를 심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부터 회심, 성화의 전 과정을 포함하는 이 전체 작업을 칼빈은 중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죽고 사는 이 작업은 다른 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았고 결정적으로 천국백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육신을 통해 죄가 역사하기에 우리는 육신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동안에는 늘 죄에 떨어지기 쉽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동시에 죄가 육신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죄를 떠나서 살 수 없다(롬 7장). 따라서 완전성화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성령의 역사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죽고 사는 작업, 다른 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작업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 작업을 칼빈은 중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전체 작업을 중생이라고 말한 것이다.
칼빈의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고전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구원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그 음성을 들었다. 놀라운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갈 1장에서 그 변화에 대해 말한다. 연도로 보면 바울의 회심이 나오는 행 9장 사건은 AD 32년경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AD 30년으로 잡으면 행 1-7장의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과 스데반의 설교와 죽음, 8장의 사마리아 교회의 부흥까지는 1-2년이 자났다고 본다. 그러면 바울의 회심은 AD 32년경의 일이다. 더구나 고린도전서를 쓸 대는 AD 55년경으로 그가 회심한 후 전도여행과 목회를 한지 20년이 지난 시점이다. 즉 이미 구원을 받았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직도 자기를 치고 있다.
우리는 성도의 견인 교리, 즉 한 번 중생한 자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면 이 교리 때문에 바울이 잘못되었는가? 그는 왜 목회한지 20년이 넘는 그때까지도 자기를 치고 있을까? 여기서 친다는 말의 원어는 운동선수 특히 권투선수가 상대방의 눈 밑을 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운동선수가 눈 밑을 때린다는 것은 케오 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상대방이 아니고 자신을 향하여 친다는 현재사를 쓰면서 끊임없이 자기 눈 밑을 때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목회한 지 2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자기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가 자기를 끊임없이 케오 시키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하루하루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바울 속에 있던 일생을 통한 거룩한 삶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이런 자세가 이때뿐인가? 아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디모데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일컫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다고 말한다. 딤전은 AD 64년경의 기록이다. 사도 바울의 회심 후 30년이나 지난 때이다. 목회를 시작한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자기의 믿지 않았을 때의 옛 모습을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믿지 않을 때 복음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했음을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같은 사람이 복음 전파자가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말하기를 괴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괴수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30년이 지났어도 자기를 향해 케오 펀치를 후려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두 손을 들고 섰다. 이것이 우리 앞에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든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죽었던 자기의 옛 모습,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해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그를 불러서 성령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예수를 믿게 하시고 일생 동안 전도자가 되게 하신 그 은혜, 이 넘치는 감격을 바울은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서신, 13권 가운데 목회서신 세 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신약학자는 목회서신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오늘날 도전적이라고 했다. 이는 목회서신의 어휘가 다른 서신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가 그의 말년에 기록된 것을 고려하면 목회서신의 바울 저작권은 문제될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살아온 그 동안의 체험을 요약해 마지막으로 믿음의 아들에게 남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신들에는 목회의 기쁨과 하나님께서 주신 넘치는 힘,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부터 넘쳐나는 구원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담겨 있다. 스스로 돌아올 때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불러 30년 동안이나 붙들고 인도해온 그 은혜의 힘을 생각할 때 바울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 서신의 첫머리를 보면 그는 인사할 때 은혜와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롬 1:7, 고전 1:3, 살후 1:2). 이 때 은혜는 십자가와 연관되고 평강은 요 20장에 나오는 평강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평강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바울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목회서신의 첫머리는 다른 서신들과 약간 다르다. 64년 후 기록된 목회서신에 와서는 다른 서신과 달리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말한다. 은혜와 평강은 다른 서신에서도 나오지만 긍휼은 목회서신에서만 언급된다. 이때 긍휼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계가 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다.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그냥 두었더라면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로 일생을 마칠 자신을 꺾어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 9장을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꺾었지만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점점 깊이 깨달아 가는 것을 갈 1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있다(갈 1:15). 이것은 바울 신학이 깊어지는 증거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일생동안의 신학을 다 받은 것은 아니다. 결정적 되돌이킴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먼저 말한 사람은 구 프리스턴 신학의 마지막 주자인 잔 그레샘 메이천 박사이다. 그는 1912년 「예수와 바울」을 썼다. 1921년에는 「바울종교의 기원」을 썼다. 하여큰 다메섹 체험이 결정적으로 바울의 걸음을 꺾어서 돌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바울에게 다메섹 체험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때 그의 모든 신학이 다 주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바울신학의 발전을 말하는데 필자는 바울신학의 진전이라고 표현한다. 물고기는 커지면 어릴 때의 형태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의 형태는 그대로 있다. 그러나 분명 커졌다. 우리가 계시의 진전을 말하면서 신약은 구약계시의 진전이라고 하듯 바울신학에도 진전이 있다. 없던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의 것을 기초로 하나님께서 그 위에 튼튼하게 하셨다. 바울은 초기보다는 후기의 서신에 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깊어진다. 그는 실제 십자가를 목격한 사람은 아니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깊어진 것이다.
그는 행 9장에서 높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부활하시니 그리스도를 통해 즉 죽었다고 하는 그분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리고 살아있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와의 교통 속으로 자기를 불렀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로 거꾸로 되돌아온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와 다르다.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을 목격하는 등 일종의 연대기 순서적이다. 하지만 바울신학은 그렇게 들어가지 않는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으로 자기를 부르셨는데 그 교통 속에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교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육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거꾸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보다 바울신학은 훨씬 깊은 자리에 들어간다.
바울은 행 9장에서 회심했다. 주후 32년에 회심했지만 갈 1:15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은 주후 32년이 아니고 그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택정했다고 말한다. 택정은 구별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해서 그의 형질이 정해지기 전에 그가 지어지기 전에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이 성별하시고 그때부터 준비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이 일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되어진 사건이라고 말하는 바울신학의 깊이를 볼 수 있다. 단지 주후 32년에 다메섹에서만 불러준 것이 아니고 다메섹 이전 그가 믿기 전 교회를 핍박하던 그 순간에도 바리새인의 아들로 자라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를 붙들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주후 32년에 때가 되어 다메섹에서 자기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때까지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성별하시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디모데에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불러주시고 어머니의 태로부터 불러주셨다는 그 감격을 가지고 목회했다. 그냥 내버려두면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로 살아야 마땅한데 그런 나를 불러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놀라운 은혜, 하나님 안에서의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바울이 목회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쓰신 것이다.
바울 속에 있는 이 놀라운 감격이 칼빈 속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부터 남은 일생동안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정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전 9:27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육신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에 가까이 있기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여 자기의 정과 욕심을 죽이고 끊임없이 자기를 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생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정과 육신을 치는 작업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는 이 일생동안의 작업을 그리스도인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3. 존 머리의 견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에 대해 교리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또 한 사람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1930-1966년까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한 존 머리 교수이다. 존 머리 교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칭의와 성화의 직접적 근거이며 동시에 칭의는 성화의 기초이고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과 성화의 관계는 칭의의 매개를 통한 간접적 관계라고 말한다.
머리 교수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성취되는 칭의 교리가 이후의 행위와 윤리적 삶의 관계에 대해 서로 적대적이라는 것에 반대할뿐만 아니라 그것이 선정적이고 방종한 원리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칭의 교리와 관련해 칭의 교리가 분명 확실한 윤리적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이루신 객관적 성취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에 있어 그 궁극적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개인의 삶에 주관적 적용과 관련된 구원의 순서는 이러한 목적에 종속되고 이 목적으로부터 발원하며 이 목적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선행이 수행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며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며 믿음과는 결코 분리 될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칭의는 믿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그 믿음은 죄로부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은 죄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부인하는 원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머리 교수는 말한다. 또한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에 그 근원과 동기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칭의가 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주장은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이며 대조적인 특징을 동일한 것으로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생은 믿음의 근원이며 믿음은 칭의의 논리적 전제이기 때문에 칭의를 중생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의롭게 하는 믿음은 회개와 결합된 믿음인 것이다.
신자의 구원의 여정에 있어 하나님의 주도권과 관련하여 교회부흥과 관련하여 미국의 부흥운동의 주역의 한 사람 찰스 피니의 회심에 대한 견해를 생각해 보는 것이 본 주제와 관련하여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피니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초-중엽 미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로 지금까지 사람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전통적 부흥관과 다른 입장을 표명한 부흥사였다. 그는 인론과 죄론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단순히 배격하는 정도가 아닌 지금까지 1차 2차 대각성운동으로 익숙한 전통적 부흥관을 뒤바꾸어놓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당신이 왜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갈망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위해 별 노력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피니는 사람이 전도할 때 드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가르쳐주어야 하고 또한 듣는 자들이 실제로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입증할 만한 어떤 행동을 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피니에 따르면 지금까지 교회가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부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위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였고 설교 도중 “강단초청”을 시도했다. 또한 피니는 자신의 견해를 따라 2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였던 아사헬 네틀톤을 비난하기도 했다. 피니의 부흥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그의 알미니안적이며 준페라기우스적인 회심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정통신학이 비실용적이라는 그의 비난 외에도 그가 자신의 경험을 성경보다 앞세웠다는 교회와 학계의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므로 칭의와 연관해 행위를 도입하는 것은 복음을 무효화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동기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응하여 그분의 영광을 목표로 하여 믿음으로 이루어진 행위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것이며 동시에 선행은 장래 삶에서 보상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와는 별개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한 개개인의 행위에 따라서 장래의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보듯 존 머리 교수에게 믿음은 행위와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가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에 대해 결정적 성화의 중요성을 학계에 소개한 존 머리의 공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 프린스턴 신학의 찰스 핫지는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순간적 행위인 칭의와 점진적 사역이어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성화를 구분하고 있다. 이에 비해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는 칭의와 성화가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동시성을 지닌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화의 결정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 점진적 측면 외에 결정적인 측면 곧 결정적 성화라는 용어를 학계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존 머리 교수였다.
머리 교수는 먼저 성화 또는 거룩과 관련된 신약의 낱말들 특히 바울서신에 나타난 용례들을 검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고 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말할 때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성화를 유효적 소명, 성도로서의 정체성, 중생, 그리고 칭의와 나란한 위치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조직신학에서 흔히 유효적 소명, 중생, 칭의는 반복되지 않는 순간적 사역으로 제시된다. 사실 그러하다면 고린도전서 1:2, 6:11등에 나타나는 성화 또는 거룩과 관계된 용례는 점진성 보다는 반복되지 않는 순간적인 단번에 되어진 결정적 사역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머리 교수는 이와 유사한 용례를 행 20:32, 26:18, 엡 5:25 이하, 딤후 2:21에서도 제시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 속에 신자들을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이라고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살전 4:7, 살후 2:13-14절에 나타난 명사형도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거룩 또는 성화와 관련된 헬라어 동사와 명사, 형용사 용례들을 살펴보면 그 점진성 보다는 대부분의 용례들이 문맥 속에서 단번에 되어진 그 결정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머리 교수는 지적한다. 그 성경적 논거로 머리 교수는 롬 6:1-7:6까지를 제시한다. 바로 선행하는 구절인 롬 5:12-21까지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의 원리를 통해 속죄 교리가 전개되고 있다. 바로 이어서 롬 6:1은 앞선 5:20에서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에 대한 반론으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 하겠느뇨”라고 질문함으로써 시작한다. 대답은 전면 부정인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반박에 대한 중심 내용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2)는 것이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가 전에 관련된 영역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그 영역과 관계단절을 뜻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의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며 그들과 함께 있지도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은 죄의 영역에서 살고 행동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삶과 행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는 죄와 유대가 끊어졌고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리하여 사도바울은 롬 6:20과 22절에 나오는 거룩함을 전체의 문맥 속에서 점진적인 상태보다는 단번에 되어지는 결정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일상적 경험 속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예를 들어서 이것이 도덕적 종교적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분리이며 다른 영역에의 결정적 이동인 것을 사도바울은 서신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머리 교수는 베드로전서 2:24을 설명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에 대해 단번의 죽음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우리도 죄에 대해 단번에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벧전 4:1-2에서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육체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에 대해 죽으신 것처럼 신자의 경우도 죄로부터 중지를 그 결과로서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 교수는 요일 3:6-9절에서도 신자의 성화의 결정성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미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라는 구절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요일 3:9)라는 구절은 사도요한이 본문에서 죄가 없는 완전성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일 1:8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요일 2:1에서도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하고 있다. 머리 교수는 요일 3장과 관련해 요일 5:16-18을 해석하는 자리에서 신자들이 저지르는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닌 것을 말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하고 있다. 머리 교수에 따르면 요일 3:6-9에서 신자는 세상에 대해 승리를 얻은 자이고 악한 세상의 지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더 이상 세상에 속한 특징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세상과 세상의 오염과 능력과는 분명하고 변경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궁극적으로는 악한 세계의 영역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 존재인 것을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해 단번에 죽은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구절들을 통해 신자는 믿음의 순간에 과거의 영역에서 단번에 분리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설정된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을 성화의 결정성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 시키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성화의 결정성과 더불어 성화의 점진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한편 머리 교수는 신자에게 있어 죄에 대한 결정적 단절, 거룩함과 의에 대한 헌신은 구원이 적용되는 첫 단계에 하나님의 각 위격의 구원 행위가 그 변화의 결정적 성격을 보장한다고 말하고 성부는 사람들을 자기 아들과의 교통으로 유효하게 부르시는데 그 행위는 그 변화가 가진 근본적 성격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중생의 씻음으로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의와 권능, 생명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되는데 그 행위는 변화의 중요한 본질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리 교수는 구원의 처음 단계에 있어 결정적 변화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령의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성부와 성령의 행위가 효력을 발휘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신자의 구원에 있어 삼위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바로 이런 측면이 종종 잊혀 왔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명제(롬 6:2)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세례의 중요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칭의보다는 성화와의 관련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말하고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자신의 구원 여정의 시작부터 성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롬 6장 초두에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여 새 생명에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하심과 신자와의 동일시에서 비롯된 관계는 신자에게 있어 칭의보다는 오히려 성화의 사역, 곧 죄의 오염과 권능으로부터의 해방과 연결된다고 머리 교수는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신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말하고 이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에 근거하며 칭의는 성화로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이 신자의 성화를 직접적인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머리 교수는 로마서 6:1-23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이 신자에게 칭의뿐 아니라 성화와도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하는 점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우리 속에 구속의 적용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전인격적인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로마서는 전체 16장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을 따라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1-5장은 죄와 죄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특히 5:12-21절은 우리의 칭의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6-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에 대하여, 9-11장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12-16장은 예배, 은사, 핍박 대처, 권세, 음식, 날, 건덕, 구제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에 대한 교훈이다.
그래서 롬 1-2장에서 죄의 심각성과 보편성을 말하고 3-5장에서 이신칭의의 교리, 곧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진리를 말하고 그 칭의의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대속의 죽음에서 비롯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런 연후에 사도바울은 6-8장에 걸친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 영역을 연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6장은 거룩한 백성, 7장은 그리스도이의 영적 투쟁, 8장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말하고 있다.
롬 7장에서 성화의 교리를 설명하고 롬 6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과 신자의 칭의와의 관계를 논한 전통적인 해석에서 머리 교수는 롬 6장에서 신자의 구원 여정에서 결정적 성화를 말하고 롬 7장에서는 점진적 성화를, 그리고 8장에서는 성령의 능력 아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3-5장에서 칭의 교리에 이어 6-8장에서 신자의 성화의 다양한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머리 교수의 공헌이 있다.
4. 결론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그 후의 성화의 삶에 관한 주제는 개혁주의 구원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에 속한다. 구원조차도 개혁주의 관점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특히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서 시작한다.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분리된 삶이 아니요 믿음에서 비롯된 삶이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예정과 구원과의 바른 관계, 그리고 개인의 삶 속에서 구원의 출발인 소명과 중생, 이에 대한 회심과의 관계, 구원의 계속인 회개와 신앙, 그리고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 수양, 성화와의 관계는 신앙과 행위가 구원의 삶의 처음부터 나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도의 견인의 바른 이해, 그리고 구원의 완성인 영화까지 이 땅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모든 과정에 성령의 역사가 전적이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이 어떠해야 하며 교회의 한 지체로서의 삶과 나아가 국가의 일원으로서 책임있는 개인으로서의 삶을 성경이 계시하는 기준 위에서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과 행위와의 성경적 관계를 논하며 우리는 칼빈의 견해와 존 머리 교수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베르카워의 업적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그는 18권의 교의학 연구 중에서 신앙과 칭의, 신앙과 견인등이 현재의 연구에 유효하다. 특히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그는 구원의 순서에 대한 비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제안을 시도했다. 그는 서정이 정황을 종종 그 그림자로 가려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구원 순서의 기원은 복음에 대한 맹렬한 변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구원의 길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그의 열망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베르카워는 칭의와 성화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바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의 진정한 연결은 오직 믿음이라고 제시한다. 성화에 있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말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교훈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는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이 문답은 돌트 신조, 벨직 신조와 더불어 화란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교회들이 전 세계에 걸쳐 공통적으로 수납하는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체험의 다양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웨슬리적인 체험만이 기독교적 체험이 아니다. 디모데적인 체험도 얼마든지 체험이다. 조용하게 일어나는 역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은사가 없어도 상관없다. 또 성경만을 강조하고 은사는 하나도 없고 성결만 하면 된다고 할 것도 없다. 은사적 요소도 따라 올 수 있다. 그리고 체험에는 윤리적 요소가 있다. 모든 윤리적인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삶이 지향하는 윤리적 특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중생 이후의 체험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성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결정적 성화)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1년에 한두 차례 부흥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 인격에는 감정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체험적인, 감적인 요소, 정서적 요소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한쪽으로만 몰아버려서 정서적 요소를 없애버린다든지 지적인 요소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양쪽 다 필요하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체험의 기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순간 그 체험의 순간을 일컬어 살아있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중요하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통, 즉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 그것이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우리 인생의 순례의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부어진 그 첫 순간부터 우리 속에 이밈 하나님의 결정적 성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어떻게 그 첫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 아들이신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목표와 방향성을 지키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사는 체험의 연속이어야 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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