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종교지도자들

새벽지기1 2015. 10. 21. 08:27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종교지도자들
관리자 2013-02-05 11:34:38 384
 

  헤롯은 거대한 규모로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함으로써 유대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그의 통치를 견고히 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성취하였습니다. 또한 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자들과 관람객들을 예루살렘에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보통 때는 10만 미만이었으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인파가 무려 27만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전 증축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셈이지요. 성전 때문에 예루살렘의 상권이 살아나고 엄청난 해외 자금이 유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재정적인 수입을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지도자들이 독식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성전에 온 사람들이 반 세겔 성전 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 많은 순례자들이 성전 세를 내고 가니 성전 맡은 자들은 막대한 재정을 손에 쥐게 된 것이지요. 성전 세는 특별한 동전, 두로 지방에서 주조했던 동전으로만 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로 동전에만 로마 황제의 신상이 새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과, 상업이 성행했던 두로의 세겔 분량이 아주 정확해서 히브리 세겔과 가장 가까운 금액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어떤 쪽이 사실이든 그 동전만을 사용해야 했던 명분이 있었던 것이지요. 로마 황제를 우상화한 동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바치는 돈, 성전 세에 에누리가 있어서는 안 되니 정확한 세겔을 사용해야 한다는 거룩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은 모든 지역에 퍼져있는 두로 동전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있다가 거기에 프리미엄을 붙여 환전을 해줍니다. 결국 순례자들은 반 세겔보다 훨씬 더 많은 성전 세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방식으로 그 당시 제사장들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을 아주 교묘히 착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또 순례자들이 멀리서부터 짐승을 끌고 오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그들의 편이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성전 안 이방인들을 위한 뜰에 대형 짐승시장을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서 흠 없는 양을 끌고 와서 제사의 제물로 바치려고 하면 그 짐승이 하나님께 바칠 제물로 합당한가를 판정하는 검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검사관들이 아무 문제가 없는 양도 무언가 흠을 찾아내 퇴자를 놓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짐승을 압수합니다. 그 짐승은 작물을 세탁하듯이 뒤로 빼돌려 짐승시장으로 내다가 팝니다. 그 시장에서 산 짐승은 하자가 있어도 검사에 무사 통과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성전에서 바가지를 쓰고 제물로 바칠 짐승을 구입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부자들은 소를 제물로 드렸고 중산층은 양을 제물로 드렸지요. 그러나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일 년 또는 평생에 한 번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에 가장 귀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이 안 되어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비둘기를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그 제물을 드리기 위해 끼니를 걸러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비둘기에 폭리를 붙여 팔므로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까지 갈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개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 사람들을 갈취하는 사기꾼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성전을 운영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이 짐승 시장의 판권을 자기 파 사람들, 즉 제사장이 아닌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내준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재물을 끌어 모은 것입니다. 그 당시 성전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서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통하여 로마 정권과 결탁해서 제국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지요. 그 대가로 로마로부터 정권과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로마가 대제사장들을 임명하고 70인으로 구성된 최고의결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거기에 속한 이들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지요. 그들이 앞장서서 주님을 죽인 것입니다. 주님을 죽인 죄목 중에 하나가 주님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성전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시스템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그 체제 속에서 그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기득권에 도전한 것이지요. 이것이 그들이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었지요. 예수님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성전을 중심하여 형성된 권력구조와 특권층 체제가 다 붕괴되고 그들이 누렸던 기득권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성전이 그 사회를 병들게 하는 부패의 온상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지금 주님이 우리 교회에 다시 오시면 너희가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교회에 문제가 있어도 과거 성전 같이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한국의 큰 교회들이 앞 다투어 몇 백억, 몇 천억을 들여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교인들을 독려했습니다.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의 근본진리이며 개혁 신학의 기초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건물 성전을 허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을 배워 알면서도 왜 목사들이 이런 짓을 할까요. 그냥 교회당 짓는다고 하면 교인들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헌금하지 않지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야 최대한 헌금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헌금하게 하기 위해 집회를 열고 부흥사라는 자들을 불러다가 성전을 짓기 위해 힘써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신다는 공갈로 교인들을 감동시켜 교인들 호주머니를 다 털어놓게 합니다.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은혜 받고(진짜 은혜는 아니지만)감동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까지 사람들을 착취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전을 짓는다고 순진한 교인들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는 것은 과거 성전에서 행한 착취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칭하여 교인들을 갈취한 무서운 사기행각이지요. 

  거대한 교회당 지어놓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교인들을 끌어 모아야 합니다. 건축하는데 융자받은 빚도 있으니 재정이 늘어야 기업과 같은 대형교회를 유지할 수 있지요. 대형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수와 돈의 힘이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똑같지요. 교인 수가 늘어남에 따라 목사에게 엄청난 기득권과 권력이 주어집니다. 교인수가 많은 만큼 성공한 목사, 능력 있는 목사이며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으로 함께 한 목사라는 천상의 대우와 영광을 누리게 되지요. 종교계에서 뿐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자치 장 선거 때면 후보자들이 대형교회목사들에게 굽실굽실합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들이 당선되는데 은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나중에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하지요. 대형교회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기득권 때문에 자신이 힘써 이룬 대형교회를 남에게 양도할 수 없어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끄떡하면 다른 이들을 종북 세력으로 매도하는 목사들이 실제적으로는 그들이 규탄하는 빨갱이 짓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근근이 생계를 꾸려갈 정도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힘써 내는 교인들의 피와 같은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어떤 목사는 교회 돈 몇 십억을 자기 마음대로 유용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세계 최대 교회의 목사라는 이와 그의 가족은 재정 비리로 얼룩져 있습니다. 

  물론 모든 대형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교적 건강한 대형교회도 있지만 그런 교회마저 대형교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와 모순을 탈피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는 나은가요. 사람들이 대형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교회를 찾는 이유는 많은 경우 작은 교회는 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규모만 작다뿐이지 그 스피릿은 똑같습니다. 작은 교회에서도 어떤 목사는 교주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교회성장에 목숨 걸고 교인들을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닦달합니다. 다행히 건강한 작은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나마 한국교회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가 사회를 정화하고 변혁시키는 기능을 하기보다 이 사회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 세상의 욕심과 자본주의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가 오히려 자본의 위대함과 편리함을 지지하고 추구하는 친 자본주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천박한 자본주의, 성장제일주의, 권위주의에 사람들이 순응하고 결국 억압당하게 하는 이 사회의 부패한 시스템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한국교회가 결코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희생한 대가로 얻은 것이지요.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구에 맞추어 복음을 왜곡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끌려면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복음을 상품화해야 합니다. 영적인 필요와 욕구를 가진 소비자들을 많이 끌기 위해 그들의 편리와 욕구에 맞추는 마케팅을 잘 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 비평가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수없이 언급되지만 정작 하나님은 설교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전하지요. 그들의 욕구와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지요. 이게 마케팅 스피릿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마케팅의 영, 시장의 영에 은밀히 이끌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일마다 모여드는 그렇게 많은 교인들 중에 정말 제자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평생 교회생활 해도 신자 됨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교회에 가득합니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 그리스도인 됨의 기준을 한없이 낮추어버린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 구원의 티켓을 안겨주고 그런 이들에게 집사, 장로, 권사 직분까지 남발합니다. 어찌 보면 중세 로마 교회가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교인들의 가족이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가르친 것보다 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의 종교적인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한다는 명분으로 큰 건물을 짓기 위해 교인들을 물질적으로 착취할 뿐 아니라, 변질된 복음, 부패한 영적인 양식으로 그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여 그들을 영적으로 유린하며 착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 주님이 오시면 너희가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종교지도자라는 자들은 이 교회의 참담한 현실에 대해 심각한 자성이 없습니다. 교회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주님의 일꾼들이 자기 앞가림하는 일에나 급급하고 한담이나 늘어놓을 정도로 너무 느긋하고 태평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을 가벼운 담소거리로 덮고 잊어버리려는 애처로운 몸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바로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