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감자 깎으며.../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3. 3. 06:36

감자 깎으며...

 

어제 감자 껍질을 칼로 깎았다.

원래는 안전하게 감자 껍질 깎는 칼로 깎았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반 칼로 깎았다.

그러다보니 껍질이 좀 굵게 깎였다.

감자 살이 아까웠다.

가장 친환경적으로 깎으려면

감자를 물에 잠깐 불렸다가 수저로 긁어내는 거다.

그러면 감자 살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채로

겉껍질만 벗겨낼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님들이 그렇게 하는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유럽 사람들의 주식은 빵과 감자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리고기도 잘 먹긴 하지만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건 주로 빵과 감자다.

나는 어제 감자를 깎으면서 갑자기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옛날 어느 가난한 집에서

공교롭게 감자 흉년이 든 어느 해의 저녁 때

엄마가 마지막 남은 감자 다섯 알을 쪄내고 있었다.

그게 그 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먹을거리였다.

감자 껍질을 깎는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우리의 경우로 바꾼다면

보릿고개 시절에 마지막 남은 보리 한 사발로

깡보리밥을 짓던 엄마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책이 없다.

산으로 나무뿌리를 캐러가든지

남의 집에 동냥을 얻으러 가야 한다.

그걸 생각하니 어제 깎은 감자가 너무 귀해보였다.

 

언젠가 우리 앞에는 마지막 감자가,

또는 마지막 밥 한 그릇이 놓일 것이다.

멀리 보면 지구가 더 이상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며,

가깝게 보면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는

마지막 감자로 연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존적으로 보면 부자건 가난한 자건

죽음 목전에서는 더 이상 먹지 못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이 그렇게 멀지 않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귀하다.

흔해 보는 것들이 더 귀하다.

나는 어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만지듯이

감자를 하나님의 몸과 피로 느끼면서 만졌다.

여전히 칼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