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후기
오늘 설교 제목은 좀 자극적으로 들린다.
“하나님의 절망”
절망이라는 단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을 창조했으며
지금도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께
절망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건 자체적으로 모순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사야는 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
이사야는 뭔가를 오해한 것은 아닐까?
이사야가 전하고 싶은 근본은 무엇일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한다.
사실 그대로 믿어야할 대목도 있고,
그 의미를 파악해야할 대목도 있다.
거기에는 사실 보도도 있지만
우화나 비유나 은유, 또는 신화도 있다.
특히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전한 것처럼 묘사되는 대목들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 하고 부른 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것을 신탁이라고 한다.
이걸 전제하고 이사야의 글을 읽어보자.
이사야는 당시 사회적 상황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했다.
정의와 공의가 물거품이 되고
야비하고 포학하고 극단적인 이기심만 작동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신다고 본 것이다.
그것을 포도원 비유로 설명했다.
우리가 그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고백의 문제다.
궁극적인 것은 증명되는 게 아니다.
역사 중간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역사가 끝나야 알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절망이라는 표현이 말하려는 것은
정의와 공의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그것이 아니면 신앙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다른 것을 뒤섞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즉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더 빛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이다.
구약은 정의와 공의가 주제라고 한다면
신약은 믿음과 칭의가 주제 아니냐 하고 말이다.
이런 문제 제기가 옳긴 하나
그것은 성경을 바로 보는 관점이 아니다.
정의 문제는 그것대로 강력하게 추구하고,
칭의 문제는 그것대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실제로 사회정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칭의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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