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에서 편집자는 이 예언의 출처를 다시 소개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을 전했다. 앞에서는 “이상”(1:1)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2절부터 5절까지는 “마지막 때”(2절, 개역개정 “말일”)에 대한 예언이다. 예언서에서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구원 역사를 펼치실 때를 의미한다. 그 때가 되면 모든 민족이 시온으로 몰려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민족을 제사장의 나라로 세워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날에 그 목적이 이루어져 모든 민족이 시온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배울 것이다. 그럴 때 민족간의 분쟁은 그치고 모든 민족이 평화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아직 그 현실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5절)고 요청한다. “야곱 족속”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걸어가다”는 “살아가다”와 같은 뜻이다.
6절부터 9절까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이사야의 탄식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고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에게 타락의 올무가 되어 우상 숭배에 빠졌고, 그 결과로 그들은 천박해졌고 비굴해졌다. 우상숭배가 번성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생각이 천박해지고 비굴해졌다는 뜻이다. 그는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습니다”(6절)라고 탄식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심하게 타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9절)라고 기도한다. 용서 받기에는 그들의 타락상이 너무도 심했기 때문이고, 심판이 아니고는 그들을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절부터 22절까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그 두렵고 찬란한 영광”(개역개정에서는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이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다(10절, 19절, 21절).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을만큼 놀랍다. 그 영광의 한 조각을 대면하는 것으로도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 영광의 한 조각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영광은 또한 두렵다. 그 영광의 빛은 인간의 모든 죄악을 환히 드러내시고 바로잡으시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 나무”(13절)는 당시 최고로 치던 목재로서 인간의 교만을 상징한다. “다시스의 배”(16절)는 당시 최대의 국제 무역선으로서 난공불락의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그것도 역시 인간의 성취와 그로 인한 교만을 상징한다. 그 날이 되면 사람들이 자부하고 자랑하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그 날이 불원간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그들은 티끌 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을만큼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에 이스라엘에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암 1:1), 이사야는 그 사건을 통해 마지막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상상했을 것이다. 대지진을 겪으면서 이사야는 인간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인간이 이룬 것들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절감했다. 과연 인간이란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는” 존재다(22절). 따라서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뤘다 해도 그것에 속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
묵상:
북왕국 이스라엘은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성했고 군사적으로 주변 국가들을 위협했습니다. 지도자들과 백성은 태평 성대를 누렸습니다.
모두가 “잘 되고 있다”고 안심하고 즐길 때, 이사야는 그들의 정신이 천박해지고 비굴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가 우상숭배로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방 종교들을 따라 점술과 무속에 심취했습니다. 우상숭배는 개인 개인의 윤리적인 타락으로 이어졌고, 개인의 윤리적 타락은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회적 부정과 불의는 결국 국력을 약화시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쇠락과 멸망은 불을 보듯 자명해 보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보고 너무 하찮케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토록 심하게 부패한 상태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묻은 손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있으니, 하나님을 무지몽매한 우상으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할 제사장의 나라로 세움을 받았는데, 그들에게 맡겨진 보화를 버리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구차한 우상과 무속과 미신에 마음을 빼았겼으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그 마음을 알았기에 이사야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9절)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즈음에 이스라엘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던 건축물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는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대심판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두렵고도 찬란한 영광”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분이 손을 들어 심판하실 때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광은 찬란하지만, 죄악을 일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광은 두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사야가 전한 두려운 예언이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더욱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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