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라바 이야기(3)(막15:8)

새벽지기1 2024. 3. 17. 06:50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막15:8)

 

어제의 묵상에서 폭력의 문제를 짧게 말씀드렸지만, 논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폭력에 늘 따라다니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를 풀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힘들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혁명을 어딘가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혁명은 기존의 가치와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선거를 통해서도 혁명은 가능합니다. 이런 혁명을 반대할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혁명인지, 혁명을 위한 폭력, 또는 강압적인 힘이 용납될만한 수준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개혁도 혁명은 혁명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종교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것이었으니까요. 종교개혁에는 크게 봐서 두 가지 세력이 충돌했습니다. 한쪽은 비폭력적인 혁명이라면 다른 한쪽은 폭력적인 혁명이었습니다. 전자는 루터가, 후자는 뮌처가 대표입니다.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이 두 사람은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루터는 농민들의 폭력이 결국은 농민들이 원하는 농지개혁도 이끌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폭력은 성서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뮌처는 그것만이 참된 개혁을 위해서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뮌처는 실패했고, 루터는 성공했습니다. 물론 뭔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나오고 있긴 합니다. 바라바는 뮌처의 입장에 선 인물입니다.

 

저는 복음서 기자가 민란이라고 묘사한 혁명 투쟁을 평가할만한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단순히 성서와 신학적인 관점으로만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고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전적인 변화라는 점에서 혁명보다 더 극단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간적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결국 우리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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