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라바 이야기(2)(막15:7)

새벽지기1 2024. 3. 17. 06:48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15:7)

 

마가복음 기자는 바라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말입니다. 그가 꾸민 민란은 물론 유대민족해방 무력투쟁이었겠지요. 일제 식민 통치 시절에 중국 땅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저에게는 바라바라는 인물이 체 게바라(1928-1967)처럼 비쳐질 때가 있습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의사가 된 사람인데,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습니다. 쿠바에서 31살의 젊은 나이에 쿠바국립은행 총재와 산업부장관까지 역임한 뒤, 볼리비아로 가서 혁명투쟁을 하다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무력 투쟁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 혁명가들이 무력을 동원하는 이유는 그 이외의 방법이 완전히 봉쇄당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존의 위협을 당하게 될 경우에 무슨 행동이나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폭력을 무조건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폭력을 손쉽게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폭력은 문제의 근본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러시아의 체첸이나 중국의 티베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폭력이 어떤 해결의 계기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상황이 받쳐 줘야만 가능합니다.

 

둘째, 폭력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과 당하는 모두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의 폭력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이런 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폭력은 무조건 악이냐, 하는 질문에 저는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임시로 필요한 폭력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걸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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