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의 처음이요 시작이다.

새벽지기1 2020. 1. 22. 06:52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의
처음이요 시작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신영복의 처음처럼)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처음이란 말이 앞에 붙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특별해진다.

첫날, 첫사랑, 첫눈 얼마나 싱그러운 단어들인가!

아기가 눈을 뜨면서 세상에 처음 탄생할 때보다 더한 처음의 순간이 있을까?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타나는 한 구절을 옮겨보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이보다 강렬한 처음의 느낌은 무엇으로 대체 가능할까?
우리가 맞이하는 날마다의 하루하루가 전혀 새로운 새날이며,

날마다의 첫날이며 기적의 날이며 그 자체로 선물이다.

그의 표현에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구절의 핵심이 잊혀 지지 않는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이며,

날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아침”이란 시에

“아침에는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늘 아침도 그렇게 “처음처럼” 시작된 하루이며 기적이며 선물인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 것에 많은 의미를 두는 이유는

가장 순수하면서도 새롭고도 새것이라는 개념과 함께

첫 시작의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처음 경험이라는 낯섦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처음에는 비교와 경쟁이 없다.

어떤 기준도 미리 설정 되어 있지 않다.

처음 시작 그 자체가 첫 획을 긋는 것으로 하여 기준이 되고 관행과 관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을 좋아하고 지금의 내 마음이 ‘처음처럼’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처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희망 사항일 뿐,

결코 처음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부질없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깨닫게 된다.

시간에 따라 그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금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 뒤틀려 있는

불만스러운 현재의 삶을 나타내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이 만족스럽다면 구태여 과거의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처음처럼’은 결코 바람직한 희망사항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가버린 처음을 고집하기보다는

날마다의 오늘을 처음으로 여기며 처음처럼 살기를 다짐하고 작정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우리가 맞이하는 날마다의 하루하루가 전혀 새로운 날이며,

날마다의 첫날이며 기적의 날이며 그 자체로 선물인 것이다.

성경에는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처음 것에 한 보다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새것, 처음 것에 하여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창1:1)는

이 말씀보다 더 처음이 어디 있는가?

태초는 처음의 근본이요 처음의 근본은 태초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계21:1)을 언급하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새로운 신세계가 어디 있을까?

주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고 말씀하신다.


우리들도 주님 앞에 첫 열매와도 같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4~5).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원한 생명 있음에 한 처음 열매와도 같다.

아버지 앞에 예배드리는 모든 심령들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처음 익은 열매들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사도행전에서의 초교회의 출현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명 공동체가 이 땅에 연한 순처럼 피어나는
어린 새싹들과도 같은 존재로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새롭고 원한 소년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제사 때의 처음 것의 소산으로서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사 원한 생축으로
온전한 제사를 성취하시고 완성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고,

최종적인 완성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것이 기독교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이 순간이 ‘가장 좋은 나중’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수 그리스도!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모두의 처음이자

궁극적 소망의 지향점인 마지막이 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