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발(롬10:14-15)
우리네 인생은 참 고달픈 나그네 인생길이다.
길을 걷노라면 발이 튼튼하지 않고서야 제로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나는 초등학교를 촌에서 6년 동안 다니면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으며
십리 길을 걸어서 다녔기에 이골이 났다.
특별히 교통수단이 거의 없었던 과거에는 먼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는 발이가장 소중한 지체다.
발은 삶의 모든 부분을 바치고 서서 그 삶을 섬기는 지체다.
발은 삶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고 발은 신앙을 설명하는 섬김의 지체이다.
발을 가리켜 제 2의 심장이라 한다.
발은 신체의 축소판으로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발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건강이 좌우된다.
발은 볼품도 없고 냄새도 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체지만
발이 없다면 자유로운 공간 이동과 발발거리며 할 수 있는 일들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발은 신체의 가장 밑바닥에서 땅의 온갖 것들과 접촉하며
우리의 신체를 우뚝 세우고 세상을 딛고 살아갈 근거를 마련해준다.
발은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멋진 부분이 아니라 그 누구도 드러내기 싫어하는 못생긴 발일지라도
그 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한 사역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실패와 약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역설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은 모든 거룩한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삶의 현장을 벗어난 특별한 어떤 장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땀내 나는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걸을 때마다 먼지가 묻고 때가 끼는 발은
날마다 부딪치며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삶의 현장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삶의 현장 속에서 지쳐있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 행위는 때가 묻을 일이 많지 않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는 날마다 때가 끼고 먼지가 묻고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성경에서는 발에 한 많은 묵상과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1:3, 14:9)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을 건널 것을 명하시며
그 땅을 정복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장면이다.
즉 가나안 땅 거민의 손에서 그 땅을 빼앗아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그 땅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의 지경까지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밟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밟고 서서 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발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는 지체요,
하나님의 복은 발로 점령하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발은 믿음의 증거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정이나 성읍을 떠나면서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다.
즉 발은 충성에 있어서 증거의 지체인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잠시도 쉼 없이 걸으셨다.
수가성에 전도하시기 위해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발,
우물곁에서 전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찾아 들어간 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메시야를 만났노라고 증거 하러 달려간 여인의 발,
그 말을 전해 듣고 접하러 달려 나온 동네사람들의 발,
한마디로 성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고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주셨다.
이 발은 앞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걸어가서 전할 발이었다.
제자들은 주님이 씻어주신 발로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하다가
그 발에 족쇄를 당하고 순교를 했다.
무엇보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아름답고 복된 발(롬10:15, 사52:7)이 되어야 하겠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이 땅을 걸으신 예수님의 발을 기억하며 발에 한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주님은 아무도 가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 지방을 일부러 지나셨고,
사람들이 비난하는 삭개오의 집에도 들르셨다.
그리고 그 발에 못을 박히심으로 인생을 구원하셨다.
주님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면 어디든지 가셨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씻을 때에 가만 두라고 하셨다.
주님의 발은 구원하는 발이요, 살리는 발이요, 치료하는 발이요, 섬김의 발이요, 희생의 발이다.
사탄은 주님을 향해서 “뛰어내려라, 하나님이 너를 받들어 네 발로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발을 자신의 광을 위하는데 사용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에만 사용하신 것이다.
그 후에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복음서에서 마리아가 언급될 적마다 한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그녀는 언제나 주님의 발아래 있었다.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요11:3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요12:3).
마리아는 자신이 즐거울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예수님의 발아래 있었다.
예수님의 지체 중에서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곳은 발 아래다.
그녀는 자신의 향유로 주님의 발에 부었고 고운 머리털까지도 주님의 발에까지 낮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들을 주님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가장 가까이 주께로 나아갔던 자다.
사실상 마리아는 자기의 인생 전부를 예수님의 발아래 내려둔 자다.
발아래 있다는 표현은 봉사와 의존을 뜻한다.
마리아의 참된 헌신의 비결은 자신을 늘 예수님의 발아래 둔 것이었다.
마르다처럼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눅10:40)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기가 어렵다.
가슴에 주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지 않는 자의 봉사는 거룩한 열심이 아니고
“구습을 좇는 옛사람”(엡4:22)의 욕심이다.
거룩한 열심과 욕심의 차이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는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된다.
주님의 발은 우리 모두의 출발지이며 종착지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적하는 모든 인생은
그리스도의 주석 같은 발에 짓 밟혀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했던가?
예수님이 씻겨준 그 발을 가지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원수들을 찾아간 가롯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예수님의 광에는 발도 못 붙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류가 달을 밟은 명성보다 2000년 전에 이 땅을 밟으신 주님의 발이
더 위대하며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다.
결국 그 복된 자들에게는 주님과 더불어 천국을 밟고 서는 위대한 날이 곧 올 것이다.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달을 밟고 온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재 가운데 있는 다른 일들, 심지어 달 표면을 걸은 것까지도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매일 발전시키는 것에 비교하면 그 중요성이 무색해진다.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당신이란 존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흥분되는 일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상을 걸으신 것이 인간이 달 표면을 걸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2000년 전에 주님께서 이 땅을 걸으셨던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 분은 오늘날도 우리의 삶 가운데 걸어가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 분을 모시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발을 잘 씻고 잘 관리해 주고 싶다.
위대하고 장한 내 발, 대견스런 내 발을 잘 보듬고 감싸주어야겠다.
미켄란젤로의 말처럼
“발은 신발보다 더 고귀하며 피부는 입고 있는 옷보다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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