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부활 신앙으로 살라! (고전15:50-58)

새벽지기1 2019. 5. 2. 06:49


부활 신앙으로 살라!

(고전15:50-58)


본문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서론


지난주일은 부활기념 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진정한 부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많이 궁금합니다. 저는 오늘 부활기념 주간을 맞이해서 <부활 신앙으로 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부활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입니다.

사르밧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고(왕상17:8-24),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습니다(왕하4:17,35).

하지만 신약의 사두개파유대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도 부활을 믿기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전1512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정말 부활이 있느냐?(12)''부활체는 어떤 모습이냐?(35)'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바로 고린도전서15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장차 부활체로 다시 태어날 것을 확신합니까?

 

본론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부활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고전15:1-19)

 

사도 바울은 부활이 복음의 핵심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로마서 109-10을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 같은 교리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단언컨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지 않은 사람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핵심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문 3-8절에서 '부활의 사실(fact)'에 대하여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은 구약성경의 성취(성경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증인들이 있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반복되는 <성경대로>라는 단어와 <보이셨느니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부활을 믿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본장 14절은

'그리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헛것=쓰레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부활의 은총을 입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구원의 절대 요소이며 진리입니다.

 

저는 부활의 소망을 말할 떠오르는 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31세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조마리아 여사는 사형선고를 앞둔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어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가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나오거라!”

이것이 부활의 확신을 가진 성도! 부활이 소망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부활의 확신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둘째, 부활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고전15:35-4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그 부활의 신비를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35-39절 내용이 바로 부활의 모습입니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여러분은 산업화 사회에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농경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37-38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먹는 밥은 쌀로 지은 것입니다. 그 쌀은 원래 벼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가을 들판에 나가 황금 들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벼가 노랗게 익었다!”

여기서 그 벼(알갱이)와 벼(나무형태)는 같은 것입니다.

즉 벼나 밀 알갱이가 땅 속에서 썩으면각각 벼가 나고 옥수수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8절 후반 부에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벼(알갱이)와 벼(나무형태)는 같은 생명이지만, ()에 있을 때와 추수했을 때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 가지입니다. 42-4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썩는 재질(?)이지만, 부활 때는 썩지 않는 새로운 형질로 변화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더럽고 욕된 것이지만, 부활 때는 거룩하고 존귀한 영광스러운 형체로 변화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약한 것이지만, 부활 때는 강한 형제로 변화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44절 표현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는 이 변화된 모습의 힌트를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마17:1-2입니다.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마22:30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것을 종합해 보건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의 변화된 모습은 신비 그 자체 일 것입니다.


제가 부활의 신비에 관한 아주 좋은 예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더 브리스벤이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애벌레와 나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아래쪽에 아직 나비가 되지 못한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그 애벌레들은 땅에 남겨진 허물들을 함께 들고

매우 슬퍼하는 표정으로 장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 애벌레에서 허물을 벗은 많은 나비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애벌레들은 허물만을 보고 슬퍼했지만,

사실 그 허물은 애벌레들이 나비가 된 증거였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겠지요?

애벌레는 실제로 2차원(바닥과 면)을 삽니다.

하지만 나비는 3차원을 살게 되지요.

애벌레들이 나비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인간의 부활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애벌레는 자신도 나중에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부활후의 모습을 모릅니다. 하지만 성도는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과,

그 부활체는 신비로운 변화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썩을 것을 심는 것입니다.

욕된 것을 심는 것입니다.

약한 것을 심는 것입니다.

육의 몸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 우리는 썩을 것을 심을 심지만 썩지 않을 몸을 입습니다.

욕된 것을 심지만 영광스러운 몸을 입습니다.

약한 것을 심지만 강한 몸을 입습니다.

그리고 육의 몸을 심지만 신령한 몸을 입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 합당한 존재로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죽음도 없고 눈물도 없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고통과 슬픔은 다 사라지고 영광만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아놀드는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 차겠네.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영원한 기쁨 있겠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셋째,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고전15:52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여기서 나팔 소리는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원래 나팔 소리는 광야의 나팔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나팔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나팔은 축제의 나팔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의 나팔 소리는 대적 앞에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부활체로 부활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 우리가 부를 찬송이 바로 고전15:55-56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여기서 사망사망의 권세를 주관하는 사단을 의인화 한 것입니다.

-사망아! 네가 나를 삼켰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렇게 부활했다-이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동시에 '사단과의 치열했던 전쟁도 완전히 종식됩니다.

우리는 그 때 이렇게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주님의 재림 때 믿는 성도의 소망입니다.


애양원을 섬기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 형제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믿음을 지키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형제의 발인예배를 인도하던 이인재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치루고 있는 장례식은 두 순교자가 천국으로 개선하는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이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천국에 입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교회에서는 발인예배를 천국환송예배라고도 표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잘못된 종말론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도록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4:13-14)“

그랬더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부작용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3:10)”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그리이스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렇습니다. 이런 자세가 부활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성도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종말적 삶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이 종말론이 정립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올바른 종말적 삶에 대하여 58절에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한계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더 소망하게 됩니다.

부활의 확신 때문에 잠시 머무는 세상 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 확실한 소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날마다 전진합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음에도

그의 마음이 언제나 가나안을 향했던 것 같이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현재의 승리'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 뿐 아니라

현실을 믿음 안에서 더 바르게, 역동적으로 사는 힘입니다.

여러분! 결코 어떤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소망을 가진 제자가 '현재의 승리'를 경험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