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아브라함의 나그네 신분과 그 한계의 극복 (창 23:4)

새벽지기1 2017. 12. 11. 11:04


“나는 당신들 중에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창 23:4) 

 

‘나그네’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다. 나그네는 자신의 본래 고장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사람이며 그곳에 머물러 있는 기간이 항구적이지 않고 임시적인 사람을 지칭한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도 나그네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고장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외지로 밀려나 지냈다(창 3:23). 가인은 더욱 혹독한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땅이 가인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그 효력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인으로 하여금 그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창 4:11-12).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그 일로 인하여 온 지면에 흩어지는 불행을 자초하였다(창 11:9). 그로 인하여 나그네 길 삶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이들의 나그네 생활은 모두가 범죄로 인한 결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에서 긍정적 의미의 나그네 살을 산 첫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사라의 매장지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소개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로서의 삶은 하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범죄나 잘못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과 지시에 따라 고향을 떠났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그네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차원의 나그네 인생관이 태동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소개한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각각 ‘게르’와 ‘토샤브’이다. ‘게르’는 ‘일정 기간 동안 머물다’를 의미하는 ‘구르’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리고 ‘토샤브’는 ‘거주하다’를 의미하는 ‘야사브’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게르’와는 동의적 관계이다. 이 두 단어는 타지에서 유입되어 기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새로운 이주민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다. 이들에게는 거주권한만 허락되었을 뿐 토지매입과 같은 재산권 행사는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이방나그네가 최하류 빈민층에 속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아브라함은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다. 그가 기존 주거지역의 중심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외곽을 떠돌며 생활터전을 옮긴 것도 그런 신분적 제한과 관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자신의 불리한 사회적 신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법과 관습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항구적인 삶의 어떤 근거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장차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철저히 믿었다.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분에게 모든 땅의 소유권이 있다는 신앙고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나안 사람들의 땅 소유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하나님과 늘 동행하였던 아브라함에게 토지의 소유 유무는 전혀 개의할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늘 삶의 당당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점은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창 23:6)라고 평가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지도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시’는 ‘들어 올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지도자란 남에게 높임 곧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에서 새로 이주해온 나그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시민권을 갖고 있던 본토인들에게까지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점을 발판으로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매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방 나그네 신분으로부터 토지소유권자로 신분이 상승되었음을 의미한다. 믿음의 사람은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신앙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천국의 나그네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들 역시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혼신의 힘을 다 하여야 한다. 가나안 전체 땅에 비하여 아브라함이 구입한 막벨라 굴과 그 주변 토지는 너무도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열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하였다.

 

우리도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위임된 영역만큼은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실제적으로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기다림도 미덕이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