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내 제자가 되려면 (눅 14:25-27)

새벽지기1 2017. 7. 27. 07:12


1. 수많은 무리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수많은 무리들을 모을려고 하고 움직일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다.

교회도, 세상에 있고, 세상을 움직일려고 하니까,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가는 것을 좋아한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가는 것을 자랑하고 어떻게든 그 수를 더 늘릴려고 한다.

수가 적으면 기가 죽고, 수가 많으면 기가 살어이다.

수는 곧 힘이고, 인기이고, 수입이고, 명예이고, 권력이다.

이거 있다가 없어지면, 우울증 걸리고 심지어 죽음을 택하기도 하다.

 

주님도, 같은 논리라면, 함께 가는 수많은 무리를 조직해서 대형교회를 하나 세우셔야 했다.

더 기대가 가고 소망이 가는 약속을 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확실히 붙어 있게 하셔야 했다.

내게 오면, 부귀와 영화가 있을 것이고, 가정과 소유와 환경에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수많은 무리에 만족하시질 않고,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감당하기도 힘든 요구를 해서 그들이 흩어지도록 하시는 것을 본다.

 

손님은 왕이니까 고객 위주로 생각을 하셔야 하는데 장사가 안 되는 쪽으로만 가신다.

위로와 격려와 소망과 축복을 부어주셔야 하는데,

웬 또 제자 얘기를 꺼내시는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모여든 수많은 무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심으로 흩으신 사건은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온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들을 떠나가게 한 말씀은 이것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절)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진리라는 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진리가 있다면,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시작하신 주님이 끝까지 책임 지실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약속하신 구원의 복음은

4천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그 큰 구원의 일을 이루시면서도,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 말 구유에 오셨고,

또 30년 동안 갈릴리 가장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목수생활을 하신 후였다.

3년 반의 사역 후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 역사를 완성하셨다.

 

수와 능력을 과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많은 무리의 숫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소수가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많은 무리의 숫자를 자랑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마 7:13-1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큰 역사를 이루는 자들은 주님이 심은 작은 가지라고 하셨고,

천을 이루는 자는 그 작은 자이고, 강국을 이루는 자는 그 약한 자라고 하셨다.

때가 이르면 주님이 속히 그 일을 이룬다고 하셨다.

 

(사 60:21-22)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주님을 따르는 그 많은 무리들 중 11명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고,

그 제자들이 세상을 복음화하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 영적 후손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로마를 정복했고 어제의 영국, 오늘의 미국을 세웠다.

 

하나님은 때가 되니까, 요단을 가르고,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많은 무리의 수로 한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주의 팔을 펴서 하신 것이었다.

여호와의 손이 능하신 것을 알게 하고, 영원히 여호와를 경외하기 하기 위함이었다.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가 모든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삼하 22:40-41)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내내 사울 왕에게 쫓기며 아둘람 굴에서 블레셋 진영에서 되는 일이 없던 그가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다.

그의 찬양이다.

 

(삼하 22:2-4)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약속대로 이루어 주셨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가 있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고난만 이어질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모세는, 손에 쥔 부귀영화와 신분과 특권을 버리고 고난과 수모의 길을 선택하였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상급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당장의 쾌락이 아니라 영원한 상급과 안식이 더 큰 것을 믿음으로 알았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수많은 무리에게 하신 말씀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고,

참으로 살 길이고, 영원한 상급과 축복의 길인 것이다.

 

2.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를 두고 대비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부모 사랑은 십계명의 5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두 계명 중 둘째에 속한다.

 

주님이 이 진리를 부인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조폭들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함도 아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복음 진리대로 살면 반드시 시련과 핍박이 올 터인데

그때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만일 그가 사랑으로 연결돼 있는 그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견실하고 변함 없는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만족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잠긴 바 되고 삼킨 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에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의무가 서로 앞을 다툴 때,

우리는 우선권을 그리스도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초대 기독교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 때문에 자기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또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내 생명에 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택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왔을 때,

내 생명을 바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택할 수 없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는 영적 생명에 대한 귀한 체험과 영생에 대해 믿는 소망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시련과 박해가 우리의 신앙 때문에 일어날 때 주로 그 선택의 시험이 있게 된다.

평온한 시기일지라도 이 문제는 종종 시험을 일으킨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의 마음을 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자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러나 시련과 시험 때문에 그렇게 겁먹을 것은 없다.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불신앙과 배교에 떨어지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 못할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는 다른 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도 자기 중심적이다.

내 옛 사람의 중심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한없이 좋을 것 같다가도, 감정이 상하고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원수로 변하는 것이 가족이다.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왜 집안 식구가 사람의 원수가 되나요?

 

각자의 사랑하는 중심끼리 부딪치기 때문이다.

집안 식구끼리의 사랑도 내 중심의 사랑이요 이기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의 사랑에서 구원받고 변할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죄인 것을 알고 회개하고 주님을 내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해야 자기 집안 식구도 그 중심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그 빈자리에 나보다 큰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는

자기 외의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첫 번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모든 계명을 요약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욕심이 많아서 자기만 사랑하라고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내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사랑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길은 주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내 중심으로 사랑하는 죄를 회개해야 내 안에, 집안 식구 관계에 천국이 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기 바란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와 자기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와 집안식구의 제자는 될지언정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3.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십자가 형은 참으로 수치스럽고 극악무도한 형이다.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 죄로 인하여 그 십자가를 지고 본을 보이셨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 21)

 

제자는 그리스도를 좇는 중에 십자가가 놓여있을 때는 언제든지 의무로서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기를 부를 때 그것을 져야 하며,

그에게 있을 보상을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야 한다.

 

사람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가 있다.

원수가 준 것 같고, 환경이 준 것 같지만, 주님이 주신 것이다.

그것을 나의 십자가로 알고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 날부터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온 생애를 통해 가야할 길이다.

우리의 생애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은혜로 이끄시는 섭리를 믿어야 한다.

그분이 배열하시는 환경과 사건들 속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지 않으면, 이 세대를 본받게 되고

그 눈으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내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것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게 된다.

 

주님의 교훈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은혜와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럴려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성령께 민감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진리와 복음의 참뜻을 분별해 알아야 한다.

 

규칙적으로 말씀과 기도의 경건훈련에 힘써야 한다.

예배와 기도회를 사랑하고 항상 주님 앞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숫자와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 과정에, 끝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상급과 영광이 제자의 길에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주님이 제자가 되는 길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눅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