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열 형들은 17살밖에 안된 요셉을 죽일려다 애굽 상인에 팔았다.
그 때 그들은 요셉의 생사여탈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3년이 흐른 후 그들은 막강한 애굽 총리 요셉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에게 요셉이 하는 말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야곱이 죽고 나서 다시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말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나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생명을 구하는 섭리를 이루고 계셨다.)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준 이름도, “사브넷바네아-생명을 부양하는 자”였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 모든 과정의 역사를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섭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은혜로운 목적과 약속을 이루시는 사역을 말한다.
은혜는 약속을 허락하고, 섭리는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 갇혀 생명이 위태로울 때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57:2)
우리 모두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그 섭리가 요셉과 다윗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생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야곱이 147년 인생을 마치며,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다(창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
오늘 우리 성도들의 생애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오늘 당한 현실만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인 줄 알고, 이젠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한탄하고 원망 불평하기가 쉽다.
요셉도 다윗도 야곱도 이 섭리를 완전히 깨달은 것은,
일이 다 이루어진 뒤였고, 생을 마칠 때 쯤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생을 마치기 전에도, 우리는 이 섭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왜 못 믿느냐?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읽더라도, 설교 말씀을 듣더라도, 도무지 믿질 않기 때문이다.
도무지 오늘 나의 형편 사정과, 나의 생애와, 관련시켜서 믿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이라도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조금만이라도 믿는다면,
오늘 우리가 하는 한탄과 절망 가운데서 많은 건짐을 받고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요셉과 같은 절망스런 환경에 떨어진 적 있는가?
가장 가까운 형들한테 죽임을 당할려다 노예로 팔려가고
강간의 누명을 쓰고 억을한 감옥살이를 한 것과 같은 절망스런 환경에 떨어진 적 있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다윗의 절망스런 처지에 놓여진 적 있는가?
아무 잘못도 한 적이 없는 다윗을 잡기 위해 사울왕은 정예병 3천을 끌고
다윗을 죽일려고 아둘람굴 입구까지 온 절체절명의 위기와 같은 처지에 몰린 적이 있는가?
그 당시에는 요셉도, 다윗도, 야곱도 몰랐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헤와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일이었다. 그 결과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었다.
(롬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배열하신 기막힌 환경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성품을 갖추게 되었다.
미리 정하신 대로 그들은 아들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얼굴이 되었다.
그들을 마침내 하나님이 축복하셨을 때,
하나님이 많은 생명들을 구하는 크신 역사의 확실한 주인공들이 되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주인공들이 되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
기가 막히고 절망스러운 환경과 위기들을 겪을 때, 당시에는 그 섭리를 다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성경이 이 모든 것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교훈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서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납득하고 용기와 소망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의 생애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곳곳에서 섭리 가운데 역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금새 이 은혜와 섭리의 경험을 잊어버리고 오늘 상황의 어려움만 보곤 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이 믿음의 눈을 감고 닥친 어려운 현실만 보고
기왕에 기적으로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한 역사였다.
한 때는 하나님이 섭리를 간증하던 입술이 절망과 원망의 입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가르고 건너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찬양하던 이들이
물이 없고 고기와 생선과 부추와 마늘이 없는 환경에 잠시 처하게 하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목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요단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주셔서 먹을 것과 환경과 소유를 풍성하게 해주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탐욕과 교만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서 우상들에게로 달려갔다.
광야에서는 없어서 탐욕의 불신앙이요, 가나안에서는 있어서 탐욕의 불신앙이었다.
고난을 주시면 하나님께 돌아와 울부짖다가
평안과 복을 주시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우상들에게로 달려갔다.
그것의 반복이 사사기 300년이고, 이스라엘 전역사의 반복이었다.
문제는 우리의 생애가 잘못하면 이런 반복으로 순환하다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생애의 역사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근원인 것을 알아야 한다.
고난과 시련, 위기와 절망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진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믿는 믿음이었다.
없는 것 가운데서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씨와 땅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였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시고 결국은 섭리 가운데 운행하셔서 온전히 이루어 주셨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시기 바란다.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서 애굽으로 보냈다. 그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팔았는데 그것은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방법이었다.
나중에 그 섭리를 깨닫은 요셉이 “나를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많은 생명들을 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것만 이루시고 작은 일은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중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처리하신다.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가 무엇인가? 모든 것, 모든 일이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과 관련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신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하나님의 섭리는 가까운 일이나 먼 일을 막론하고,
성도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눅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섭리는 일단 시작하시면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행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거나 거부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든 섭리의 결과는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도 못하고, 섣불리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곤경과 시련에 처할 때면, 이럴 수는 없어하며 주둥이가 튀어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의 진정한 유익과 행복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다윗의 말대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많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마음에 소망과 용기를 주어 큰 시련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57:2)
이 기도를 할 때, 다윗은 죽음이 목전에 이른 상황이었다.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다윗은 언제 동굴에서 끌려나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주님을 향해 이 기도로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절박한 상황과 신앙고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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