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어떻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3)

새벽지기1 2017. 7. 19. 07:2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단의 종이 되어 죄악에 빠져 있는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직 구원만 목적이라면 죽기 전에 주어도 되지 않는가? 이미 구원 주기로 예정하여 선택해 놓았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신자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화 시키고, 종국에는 천국에서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영화롭게 하는 제 2, 3의 목적이 있다.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세상을 당신과 화목 시키는 직분을 맡기기 위해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노릇을 하게 했다. 신약 신자도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게 하여 불신자들과 당신 사이를 막고 있는 중간 담을 허물도록 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나 오늘 날의 신자가 그 소명을 제대로 준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명을 몰라서인가? 믿음이 약해서인가? 기도를 적게 해서인가? 아니다. 바울처럼 앞만 바라보고 소명을 실현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진하지 않아서다. 무조건 선교사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처럼 풍부와 궁핍에 자족하는 비결을 알지 못해서다.

다른 말로 궁핍할 때만 하나님을 의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돈의 많고 적음에 소명이, 아니 믿음마저 좌우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돈을 많이 가지려고 믿음을 동원한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은 없고 자기가 소명을 만들었다. 겉으로 도덕적 종교적 의로 치장해서 말이다. 심지어 자기 욕심을 소명인 양 가장한다. 아니 욕심인 줄 알고도 믿음지상주의식 믿음에 익숙해 있어서 오히려 잘하는 일인 줄 착각한다. 본문 같은 구절을 문자적으로도 온전히 해석하지도 못하면서 아주 좋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인양 자나 깨나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믿음이 춤을 춘다. 정확하게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정이 자신도 절제하지 못하고 심지어 도저히 예측도 못할 만큼 심하게 Up-and-Down 한다. 믿음으로 범사에 접근해야 할 신자의 감정이 팔색조요, 카멜레온이요, 자기 믿음에 아주 큰 방해물로 천대 당한다.

사실은 감정이 믿음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다. 단지 감정에서 시작해서 느낌으로 끝나는 믿음, 그 이름만 믿음일 뿐이다. 스스로 도를 닦으며 수양하는 현자(賢者)보다 감정 처리나, 심지어 금전적으로 자족하는 비결에서조차 훨씬 뒤진다. 돈을 많이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그저 울부짖는 기도만 하고 있으니까 감정이 춤출 수밖에는....  

예수님이 구유에 아기로 태어날 때에 천사들이 어떻게 찬양했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탄생 때의 찬양이라면 성육신한 목적이다. 하나님께 영화는 당연히 죄인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뜻이다. 또 기뻐하심을 입은(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했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준다고 했다. 성도들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게 하여 그 안에 평화가 가득 차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성도 간의 교제가 참 사랑과 섬김에 바탕을 두어 굽음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 흔히 발생하는 시기, 미움, 분쟁은 물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 즉, 감정적인 측면에서마저 왜곡과 실패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온 목적이라고 한 것이다. 요컨대 주님은 구원받은 신자 개인과 공동체가 평화를 가지도록 오신 것이다.    

땅에서 평화는 어떻게 얻는가?

그럼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가능해지는가? 신자들이 항상 교회에 모여 찬양 뜨겁게 부르고 기도 열심히 하면 되는가? 모든 일을 은혜로 처리하자 하면서 목사나 제직들의 비행마저  없던 일로 넘어가면 되는가? 아니면 내적치유 집회를 수시로 열고 성령의 은사를 장려하면 되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감정적, 종교적, 도덕적, 영적 평강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도 기독교 또한 도 닦는 수준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한 마디로 바울은 당신께서 죽기까지 자기를 사랑해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풍부든 궁핍이든 자족하게 된 것이다. 신자가 된 자기 신분, 특권, 위치, 소망, 운명 모두를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만 그 든든한 뿌리를 두었다. 단순히 찬양하고 기도하여 정신적 안정을, 그것도 일시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앞 로마서 7장에서 자기야말로 사망의 몸이라고 울부짖으며 평강이 도무지 없어 괴로워했다. 그러다 그가 복음 안에서 얻은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 자기가 있다는 너무나 확실하고 간단한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다.  

그가 단순히 자기 관념 속에서 교리만 재차 다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밝혔듯이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를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핍박과 현실적 환난이 복음 전파를 일시적으로 가로막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낸다는 것을 수도 없는 체험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무조건 신자의 편에 서계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옳으며, 또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은 응당 이뤄진다는 체험적 확신이다. 그냥 그분에게 맡겨놓으면 그분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할 일은 오직 자기에게 맡겨준 소명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린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지켜줌에 절대 의심하지 않으므로, 즉 평강을 이미 얻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그 팔에 안겨 편안히 잘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온전하게 바로 잡으면 온다. 바울이 자신이 겪은 고난들을 열거해 놓은 내용(고후11:23-27)을 살펴보라. 바로 그런 고난의 경험이 로마서 8장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빌립보서 본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는가? 또 그래서 교회에 보낸 편지마다 그가 서두에서 항상 강조한 문안 인사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였든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 하늘에선 영광 땅에는 평화와 같지 않는가?  

바울이 우리 수준에는 아주 무모해 보이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 장소가 어디인가? 바로 감옥 안이었다. 우리 같으면 도무지 불안 염려 초조 분노 저주가 들끓어 한 시도 편안할 수 없는 상황과 여건에서 그랬지 않는가? 다른 말로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감정적 평강을 산 속의 조용한 수도원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 하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평강이 가장, 과장, 위선, 임무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 식으로 하면 수양하여, 기독교식으로 하면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여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온전한 평강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붙들려 있음을 확신하고 자기 소명을 실현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올바른 길인 것이다.

신자는 바울처럼 세상에 뛰어들어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방식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환난과 궁핍이 따르든, 비방과 핍박이 닥치든 오직 주님 주신 소명을 안고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세탁소를 하든, 음식점을 하든, 또 다른 일을 시키든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천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정말 최고의 기술과 정성과 신용과 정직으로 섬겨야 한다. 한 마디로 세상을 선도해서 거룩하게 이끌고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나아가 정말 온유와 두려움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이 믿고 있는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때와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말로 풀어서 전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랐기에 예수님과 똑 같이 환난 중에도 기뻐했고 또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안에서” 항상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고 있음으로써 내면의 평강부터 이루어야 한다. 감정을 바르게 절제함에 있어서 바로 이런 평강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적인 비결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감정도 자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처럼 아주 적절하게 절제 표출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