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내 몸을 쳐 복종케 함 (고전 9:24-27)

새벽지기1 2017. 4. 4. 07:15


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쳐야 한다.

 

주님께 복종하기 위해 내가 나의 몸을 쳐야 하는데,

오히려 나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남의 몸을 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남의 몸은 잘 치면서 자기 몸은 같은 진리로 칠 줄 모른다.

 

(롬2:1-3)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은 아내를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아내의 모든 언행을 친다.

반대로 어떤 아내들은 남편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남편의 모든 언행을 친다.

그러면 복종이 일어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반대급부가 날아오게 마련이다.

남을 치면 반드시 반대급부로 상대방도 나를 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지식은 잘못 쓰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뿐이다.

바리새인이 되고, 자기 의의 칼로 남을 상하게 할 뿐이다.

남을 가르치는 진리가 나를 가르치는 진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참으로 힘쓸 일이다.

 

주님은 본을 보임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택하셨고,

제자훈련에서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삶의 전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같이 이유이다.

주님께 진리에 인도하심에 복종키 위해 내가 내 몸을 치면

남도, 원수도, 어느날 같은 진리에, 같은 주님께 복종할 날이 온다.

 

정말 두려워 해야 할 일은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던 사람이 그 진리로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도 하셨지만

그 말씀의 본 뜻은 바리새인 같은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지 우리는 선생이 되어야 한다.

 

항상 초보에만 머물고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될 일이 아니다.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우리는 성숙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히5: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남의 몸을 쳐서 자기 뜻에 맞게 고칠려고 하는 것은 분란만 일으키고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문제가 생길 때, 육신대로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일이 일어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직 자기 육신대로 육신의 생각과 방법만으로 해결할려고 한다.

결국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죽고 안되는 쪽으로 가고 만다.

 

영으로써, 성령으로 내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의지도 필요하지만 성령을 힘입어야 내가 의로 죽이는 길로 가지 않고 사는 길로 간다.

진리를 떠나 살아온 내 몸의 행실을 영으로 죽이는 일부터 해야,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의 부모가 있을 뿐이라는 말씀은 맞는 말씀이다.

문제의 부모가 육신대로 산 결과가 반드시 죽을 일, 문제아를 만든 것이지요.

문제아를 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영으로써 나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은 비단 문제아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와 위기와 어둠과 혼란들을 다 이 진리로 풀 일이다.

상대를 치던 손을 돌려, 상대를 잡던 진리를 돌려, 그것으로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한다.

 

나는 한없이 게으르고 할 의무와 해야 할 일들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입만 살아서 선생 노릇하고 손가락만 살아서 지적하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의 결과를 수확할 날이 오고야 만다.

 

영으로써 내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버림 받을 일이 없고 사는 일이 생길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2 모든 일에 절제하라

(내 몸을 내가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은 소극적 의미에서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동선수들이 모든 세상의 좋아하고 즐기던 일들을 접어두고 합숙소에 들어가

오직 한 목적,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비지땀을 흘린다.

 

우리는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승리의 면류관은 다른 모든 것을 절제하고 그 끝에 얻은 상인 것이다.

그 합숙과 훈련의 절제를 못 지키다가 망하는 길로 간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있다.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린 사람들의 말로도 참으로 비참하다.

절제도 성령의 열매이지 육신의 열매는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육신의 생각으로 하는 절제들은 오래 가질 못하고 고삐가 풀릴 기회가 오면 사고를 치고 만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진리를 우리는 터득하고 영과 진리 앞에 머리 숙여야 한다.

평소에 성령을 근심 시키는 일을 삼가고, 오히려 영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받아 은혜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행복하고 자유하고 사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한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가운데서 갈등을 일으킬 때 성령의 소원에 순종해야 한다.

육신의 소욕에 순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의 일이 터지고 만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훌륭하던 다윗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밧세바를 취하고서는

그 간음죄를 가리기 위해서 살인죄까지 범한 결과는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의 수확이었다.

그의 말년과 후손들은 칼이 그의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삼하12:9-11)'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햇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여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 거룩의 길이고 축복의 길이다.

성결 없이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기대할 수 없다.

내 육신의 소욕대로 마음대로 살아놓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은 신성모독일 뿐이다.

 

생활과 습관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삶을 살아놓고서는

왜 내게 복과 영광을 주시지 않느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바벨탑을 높이 쌓았다고, 많은 업적과 부를 쌓았다고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 그것들은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살려주질 못한다.

 

(겔7:19-22)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할진대, 교회도 교회가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아끼고 의지하던 금은들이 오물같이 여겨지듯 교회도 오물처럼 처리되고 만다.

그 화려하고 기뻐하시던 솔로몬 성전도 그들이 법을 버리고 절제를 버렸을 때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가 살면서 모든 일에 절제를 잃으면 그래서 거룩함을 잃으면,

우리가 쌓은 부와 풍요들이 하루 아침에 오물 같이 여겨지고 교회도 무너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것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한 것에 지나지 않다.

절제와 성결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고, 얻으면 복과 영광의 모든 것을 얻음을 기억하자.

 

복과 영광은 우리의 행함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영광이셨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주실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절제하여 받는 면류관은 세상의 썩어질 승리의 관이 아니다.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일에 절제하여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간 자에게 면류관을 주신다.

 

3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 상을 향해 달음질 하는 것이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영원히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으려면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썩을 면류관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것을 성경은 향방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방향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이지요.

 

향방 없이 달려간다고 야단을 치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게으른 자들이고 이 게으른 자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난과 궁핍이 군대같이 강도같이 이를 뿐이다.

 

(잠24: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고난과 역경이 우리의 게으름에 대한 핑계와 변명이 될 수 없다.

여호와의 구름을 따라 행진하고 유진하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직임을 지켰다고 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의 조건은 부지런과 믿음과 인내이다.

(히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각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얹혀서 업혀갈 수 없다.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부지런’이 항상 변함없이 일정하게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 위함이다.

 

‘동일한 부지런’을 잃어버리고 우습게 여기고 게으름을 합리화하고 주저 앉기 때문에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 치고 끝까지 풍성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을 보았는가?

 

그런 사람일수록 입만 살아서 독설을 퍼붓는 욥의 아내의 입을 닮아갈 뿐이다.

게을러서 동일한 부지런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인내도 지킬 수 없다.

믿음과 인내를 지키는 사람은 동일한 부지런을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부지런’은 상을 얻기 위해서 약속된 기업을 얻기 위해서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믿음과 인내를 지키며 꾸준히 변함없이 달음질하는 것이다.

그 끝에 목적지에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상을 받으려면,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 각자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오래 참으며 동일한 부지런으로 살아야 한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씀한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믿음의 사람인 우리도 이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그것이 복과 영광을 가져오는 길이다.

우리도 이미 얻지도 못했고 온전히 이루지도 못했다.

우리도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미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달려가야만 한다.

 

무엇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푯대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 되어야 한다.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삶의 푯대가 없고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 없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만을 사랑하여 그것을 푯대로 향하여 달려갔던 사람들은

생애 중에 그 영에 환난과 곤고한 날이 이를 것이고, 진노와 징계의 심판 날이 이를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도 상이 하나도 없어 겨우 불가운데서 구원받은 자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다.

(불탄 집에서 겨우 살아서 나온 사람의 비참한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다.)

 

(고전3:14-15)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행한 대로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세상만 믿고 세상의 있는 것들만을 믿을 때가 아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과 인내, 그리고 부지런, 어느 하나도 잃지 않도록 깨어나자. 일어나자.

탐욕과 정욕을 따라 게으르게 사는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계속 그러한 육체의 일들을, 육신의 생각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후에 버림을 당하는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한 부지런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름의 상을 푯대로 하여 달려가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다른 모든 일은 절제해야 한다.

 

다시 한번 오늘 주일을 기하여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그래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기로 할 것은 하기로 결단하자.

그리고 우리 삶의 푯대를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수정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자.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모든 일에 절제하고,

상의 푯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삶에 축복과 영광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