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자유는 가능한가?

새벽지기1 2017. 3. 18. 11:13


인간은 자유의 존재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자유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하여, 인간은 공기 없이도 살 수 없고, 태양 없이도 살 수 없고,

밥 없이도 살 수 없지만, 자유 없이도 살지 못한다.

삼라만상 중에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오직 인간만이 자유 없이 살지 못하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그런 면에서 자유는 인간이 동물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차원으로 승화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변곡점인 셈이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부르짖음 또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인간의 존재론적 아우성인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에로 구원하신 것도

자유 없이는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격적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 자유는 가능한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가 과연 가능한가?

모든 인간이 원하는 자유,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자유를 모든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 자기만의 존재론적 자유는 가능하겠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학적 자유는 가능하지 않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사회학자답게 ‘자유란 오직 사회적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

자유는 개인 자신의 소유물이나 재산 따위가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특정한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발언했다(자유. 21쪽).

 

생각해보자.

모든 이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구가한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될까?

모두가 원하는 자유의 세상이 펼쳐질까? 평화의 세상이 펼쳐질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만인이 개인의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고 구가하면

필연적으로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맞부딪쳐 충돌하는 자유의 격투장이 된다.

만인과 만인이 격렬하게 갈등하고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안다.

하나님께서 이 정도를 내다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여, 하나님은 태초에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선물하지 않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선을 그음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즉 너 앞에서의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범주의 한계를 가진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부족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물한 자유는 정녕 완전한 자유였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조차도 결코 침범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였다.

하지만 그 완전한 자유는 하나님을 등지고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였다.

너의 자유 앞에서 멈추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였다.

즉 개인적 자유가 아니라 관계적 자유라는 점에서 독특한 자유였고,

너 앞에서의 자유이기에 제한된 자유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자유였다.

 

진실로 그렇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애당초 개인의 자유가 아니었다.

너를 부정하는 자유, 너에게 구애받지 않는 자유가 아니었다.

오직 너 앞에서의 자유, 너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계 안에서의 자유,

너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제한된 자유였다.

인간의 자유만이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자유도 그랬다.

하나님의 자유도 철저하게 인간의 자유 앞에 멈추는 자유,

인간의 자유를 절대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 자유,

사랑의 극치로서의 자유, 사랑으로써만 가능한 자유, 너의 자유 앞에 멈추는 제한된 자유였다.

 

‘제한된 자유’, 논리적으로는 명백한 모순이다.

자유에 제한이 있다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된다. 무엇인가 제한 앞에 서는 순간 자유는 상실되고 만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제한된 자유만이 완전한 자유였다.

너의 자유 앞에 멈추는 제한된 자유만이 참으로 완전한 자유였다.

하나님께서도 이 자유를 사셨다.

아담의 자유 앞에서 멈추는 제한된 자유, 선악과를 먹는 순간 온 세상에 어떤 재앙이 밀려들지 알면서도

아담의 자유 앞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멈추는 제한된 자유를 사셨다.

하나님은 진실로 제한된 자유를 통해 완전한 자유를 사셨다.

 

그런데 부패한 인간은 이런 자유를 살 능력이 없다. 아예 없고, 도무지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간 사회 속에서 자유는 하나의 특권으로 탄생한다고 했다.

자유는 사회적 조건의 비대칭성, 즉 둘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확인되는 것이며,

인간 사회 속에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차이를 뜻하며,

의무를 면제받는 것을 뜻하며, 의무를 면제받는 특권으로 통한다고 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배타적인 권리를 뜻한다고 했다.

지배하는 자는 자유롭고, 자유로운 자는 지배한다고 했다(자유. 25-26,46,56쪽).

중세의 귀족들이 다 그러했고,

우리나라의 고위 공직후보자들이 유달리 본인이나 아들의 군 면제 사실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이다. 인간 사회에서 자유란 고작 특권이자 권력이었다.

상대를 지배하고 차이를 확보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사랑 없는 폭력이었다.

국제관계와 국가 권력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다.

작은 촌락에서도, 교실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애인관계에서도,

친구관계에서도, 두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에서나 힘의 불균형이 드러나며,

자유는 그 속에서 특권과 권력으로 기생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온통 그렇다.

온 사회에 제한 없는 개인의 자유, 사랑 없는 폭력으로서의 자유가 넘쳐난다.

갑의 자유가 인정사정없이 을을 지배한다.

그래서 예부터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던가 보다.

그 말마따나 사람들은 열심히 출세하려 한다. 권력을 쟁취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인 돈을 축적하려 한다.

출세만이, 권력만이, 돈만이 자유를 가능케 하니까.

 

사실이다. 인간에게 자유란 언제나 사랑 없는 폭력이었고, 너에겐 불가능한 나만의 특권이었다.

자유란 자고로 인간이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고, 쟁취해야 하는 자유는 언제나 피 냄새를 풍겼다.

이것이 그동안 인간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여겨왔던 자유의 맨얼굴이다.

제한 없는 개인의 자유,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는 자유, 인간이 사회 속에서 개발한 자유의 맨얼굴이다.

 

하여, 다시 묻는다. 자유는 가능한가?

인간은 자유의 존재요, 태초부터 자유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는데

과연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살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런 자유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유를 주신 적도 없거니와 그런 자유가 실현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역사가 증언하는 진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애써 이 진실을 외면한다.

진실은 외면한 채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꿈꾼다. 애당초 환상이거나 망상인 개인의 자유를.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꿈꾸고,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려 몸부림치는 한 자유를 사는 길은 막힌다.

이 세상에 몸담고 사는 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자유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자유의 존재인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도 없고,

자유를 위해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자유의 길이 열리지도 않는다는데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어찌해야 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하기 어려운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까?

솔직히 특별한 묘책이 없다. 그저 이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일 뿐만 아니라

묘책이 없는 딜레마라는 걸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밖에는.

그리고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너의 자유 앞에서 멈추는 제한된 자유만이 참으로 완전한 자유요

하나님의 자유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밖에는.

또 하나, 하나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실행할 수 없다는 걸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묘책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부정적 진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때에만

하나님의 자유, 사랑의 극치인 자유의 길이 살포시 열리지 않을까?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히고 사랑의 포로가 되어야만 자유의 길이 스르르 열리지 않을까?

하나님의 계시가 열리듯 비밀스럽게.

그마저도 순간일 테고, 부족한 것일 테지만.

 

나는 믿고 기다린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하나님의 자유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를 행사하며 노래할 것임을.

지금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자유를 살 것임을.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이 땅에서는 실행 불가능한 자유를 살라고 부름 받았음을.

폭력이 아닌 자유, 특권이 아닌 자유, 지배가 아닌 자유를 살라고 부름 받았음을.

말과 생각으로만 가능한 자유를 살라고 부름 받았음을.

 

아, 이 또한 모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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