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산지 김요단선교사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누가복음 2:30)

새벽지기1 2017. 3. 7. 07:45



이스라엘 연수에 허락된 말씀은 시므온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아기 예수를 본 이후의 고백이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는 커녕 스스로 생존할 수도 없어서 다른 이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기를 보면서

내눈이 주의 구원을 본다고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었다.


처음에 이스라엘 연수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주님의 숨결이 있었던 발길이 머물렀던 곳을 밟으며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갔을 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 줄 알게 되었다. 예수가 잡히시던 밤에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를 늘 겁장이 비겁장이로 그렸었는데 베드로는 정말 예수를 사랑했고 예수를 죽기까지 따르고 싶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두려움앞에 사랑하는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면서 그 절망이 얼마나 컸을까 느껴졌다.

그 베드로의 모습이 내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나역시 주님을 사랑하고 죽기까지 따르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크고 작은 일들 앞에서 얼마나 본능적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자인지...

말로 배반하지 않아도 결코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없는 욕심과 자기 변명과 합리화 정죄와 판단...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번 물으셨던 것처럼 내게도 물으셨다.
결코 사랑을 고백할만한 자격이 스스로 안된다 생각될 그때 주님이 물어보신 이유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나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주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

너는 내게 사랑을 고백하기 합당한 자다 라고 말씀해주시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보게하신 것은 넉넉히 이기는 교회에 대한 영광이었다.
날마다 올라오는 열방의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교회의 소식들은 혈루병 걸린 여인처럼 소망이 끊어진 절망의 상태이다.

열방도 나도 넉넉히 지고있는 것 같은데 주님은 넉넉히 이긴다고 하신다.

핍박으로 지고있는 것 같은 메시아닉 주들 이슬람안의 교회들...

이스라엘에 앞서 들린 터어키와 7대교회에서 수없이 들리던 아잔소리(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라고 외치는 소리)

그리고 예수님이 거니셨던 예루살렘에서 들리는 아잔 소리는 마치 교회의 패배를 조소하고 적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곳에 살아있는 당신의 교회가 이스라엘에서 불사조 나무라고 듣고 실제로 보았던 감람나무 새순처럼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터어키에서는 지난 2007년 잔인하게 무슬림 광신도들에게 살해 당했던 세 사람의 순교자중 한사람인 네자티목사의 무덤에서 승리를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은자의 무덤에서 살아있는 교회를 보았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교회를 보았다.


형제의 무덤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예수님이 말하시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것이고 생명은  주께 있기에 죽음도 유익이다. 그리고 1972~○○(무한대 기호)라고 씌어있었다. 완전한 주님의 승리가 넉넉히 이기는 교회위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5번에 걸쳐 메시아닉주 교회와 센터, 모임이 있었다.

유대종교인들의 상상할 수 없는 핍박 가운데 때로는 쫓아다니면서 귀에다 확성기를 대고 조롱하고 침을 뱉고

아내를 아이들을 조롱할 때마다 함께 싸우고 싶은 내면안에서의 영적 전쟁에 대해...
그러나 지금은 박해가 줄어들어 영적으로 오히려 슬럼프를 겪고 있다는 아내에 대해 기도해달라고 너무도 진솔하게 나눠주는 형제의 고백을 들으면서 연약한 디아스포라된 자신을 통해 또다른 연약한 형제들을 세우는 러시아계 유대교회들을 보면서 우리의 이기고 지는 것이 우리의 어떤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이기는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감격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결코 끝날 수 없는 당신의 열심이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이 나와 교회를 붙들고 계신것을 보았다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몰려든 수많은 인종의 다양한 분파의 사람들...

처음엔 그들을 관광객이나 종교인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골고다를 오르는 길에서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이땅의 교회들도 어떤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의 모습이고

어떤 교회는 부요하여 배부른 교회의 모습처럼 비춰질 지라도 교회는 그들의 어떠함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비밀을 마음 깊이 새겨주시는 시간이었다.(롬 8:37)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닌 주님의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기는 교회로 나와 이땅의 교회를 부르시고 지금도 여전히 그 십자가 사랑의 농도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의 구원을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시간이었다.


믿음으로 주님의 마지막 꺼지지 않을 부흥을 본다.

이미 그 불길이 나와 이땅의 교회들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믿음으로만 기도할 때만 볼 수 있다.
곧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교회로 서서
광야에 외치는 자로 그렇게 살다가 주님 맞고 싶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