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자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신학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그곳에 계속 살았다. 1980년 4월 초, 군목으로 입대하면서 서울을 떠난 뒤로 지금까지 주로 경상도에서 살았다. 여기 경상도 사람들의 여러 기질이 특이한데 그중의 하나가 끼리끼리 모임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계’라고 불리는 모임이 여기서는 ‘계추’라고 불린다. 이런 계추가 아주 많다. 내가 사는 하양만 해도 여기가 고향인 사람들은 여러 개의 계추 모임에 들어있다. 서로 어울려서 지내다는 뜻인데, 잘만 운영된다면 외로움도 달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실제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아마 교회 모임도 그런 성격이 강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물론 신앙이 그 밑바탕에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조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조폭’에서 그런 문제가 극단적으로 일어나겠지만 모든 조직이든 일단 그런 인간관계가 중심이 되면 본질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남녀 선교회, 주일학교, 성가대, 당회 등등, 이런 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에 인간적인 연대가 강화하면 이상하게도 신앙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을 줄어드는 경향이 높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단독적인 만남의 경험에 기인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혼자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혼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어느 정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그만 두자.
그런대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혼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를 대기는 쉽지 않은데, 우리에게 함께 모이는 집회가 지나치게 많다는 게 하나의 예는 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모인다. 혼자서는 신앙 유지가 불가능하니까 함께 모여서 그걸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마 이런 걸 ‘모이기에 힘쓰라’는 구호로 합리화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약점이라는 걸 호도하는 구호일 뿐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계추로 많은 모임을 갖듯이 교회도 역시 그런 차원에서 잦은 모임을 갖는다.
그런 모임만으로는 우리의 영성이 심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동의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개인이 중요하다. 한데 어울려 그런 종교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게 곧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건 신앙 이전에 우리의 일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자기 혼자서 숨을 쉬어야 한다. 함께 숨을 쉴 수는 없다. 내 허파로 들어가는 산소는 내가 들이마셔야 한다. 우리가 꽃을 본다고 하자. 함께 꽃을 보고, 함께 즐거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보는 주체는 나다. 내 눈으로 보아야만 꽃을 실제로 보는 거지 다른 사람이 보는 걸 내가 보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이 우주에 대한 경험은 단독자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철학은 곧 우주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태도이며 경험이다. 이게 두려워서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물론 이런 공동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런 공동의 축제만으로 우리의 삶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아이가 되려고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동네 아이들은 혼자서 책을 보거나 생각하는 걸 두려워하고 몰려다니며 놀아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그렇게 몰려다니듯이 신앙생활을 한다. 목사들도 신자들을 그렇게 훈련시키고 있다. 신자들고 그렇고, 목사들도 그렇고 우리는 서로 ‘마마보이’를 키우고 있으며 거기에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적으로 어른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 앞에 혼자서 서게 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혼자서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직면하는 길밖에 없다. 위험스러워도 혼자서 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무덤에 혼자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