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의 이중성
반사회적인 일에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한국 사회에 부도덕한 일들이 다른 나라 못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 기독교 신앙이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나가는 데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중의 하나라고 본다.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윤리와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
우선 윤리 부분과 연관해서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어 있다는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기복(祈福)적인 관심에만 머물러 있거나 또는 신앙을 교양의 수준에서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복신앙은 주로 지적 수준이 낮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며, 교양으로서의 신앙 형태는 비교적 지성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지만, 윤리의식이 모자라거나 파손되었다는 점에서는 이들 양자가 똑같다. 예수님을 믿고 (거의 세속적인 차원에서) 복을 받겠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킨다는 뜻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이웃과 사회를 돌아볼 여유는 가능하지 않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이웃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회복되면 기독교인의 윤리성이 확보될까? 물론 상대적으로 좋아질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선 완전한 신앙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죄는 죽어야 끝장난다"는 마틴 루터의 말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자기를 제어하는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어느 정도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멈추어 있을 뿐이지 기회가 오기만 하면 아주 간단히 우리를 갖고 논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윤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칸트가 기독교 신앙을 이런 '윤리'의 범주 안에서만 타당한 것으로 언급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 리츨의 윤리신학이나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 같은 신학 사조에서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관계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적인 길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규범과 윤리적 규범을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의로움을 획득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윤리적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을 우리가 칭찬하고 존경하듯이 바리새인들도 그런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윤리적 모범생들보다는 오히려 죄인들,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훨씬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는 윤리적으로 자기를 성취해서 자기 만족감에 싸여있는 사람보다는 그런 윤리적 모범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태도가, 성서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하는데, 그런 태도가 훨씬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남에게 본보기가 되는 윤리적 지평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신앙의 지평과 연관된다. 결국 기독교 신앙과 윤리적 행위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윤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상당한 부분에서 윤리적 요청과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역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보살펴야 할 우리의 책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기 전에 이웃과의 불화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소위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당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시오"라는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궁극적으로 '원수사랑'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윤리의 철저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위대한 기독교 교부나 스승들은 철저하게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수준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건강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는 대개 윤리적 실천도 함께 따랐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신앙의 본질은 아니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비유 '나무와 열매'에 따르면 나무 자체는 신앙이고 열매는 윤리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윤리의 존재론적 근거이고 윤리는 신앙의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 신앙의 존재론과 윤리의 인식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적이며 동시에 상호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존재론의 우위성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늘 제한적이고 가변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8세기의 청교도적 기준으로 오늘 기독교인의 윤리를 재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2천년 전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은 오늘 21세기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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