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분 생각에, 도움을 주는 것과 도움을 받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어려울까요? 얼른 생각하면, 주는 것이 더 어려울 거라는 느낌이 옵니다. 실제로,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매우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병적이기 때문에 일단 접고 생각합시다. 그냥 보통 사람들, 마음에 웬만한 감동이 있으면 즐겨 손을 뻗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눈치가 있는 분들이라면, 제가 질문을 유도해 가는 것을 보고 정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아마도 도움을 받아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많지도 않았던 전세금을 달러로 바꾸어 미국으로 와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몇 년 동안 무력하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여러 종류여서,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통해 위로와 용기까지 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받는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비참한 느낌을 견디면서도 그 도움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할 때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낯선 사람이 주는 도움이라면 사양하고 차라리 굶겠지만, 도움의 손길을 뻗친 사람의 낯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받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한 시 바삐 이 상황을 탈피하여 나도 주는 자의 입장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저 자신에게 아주 좋은 영적 훈련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 저는, 줄 줄만 알고 절대 받지는 않는 어느 교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열심있는 신자요, 근면하게 일하는 분이요, 많은 재산을 모은 분입니다. 그분은 마음도 너그러워서,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서슴치 않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다가 감사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드려도 받는 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으면, 더 큰 것으로, 즉시로 되갚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과 만나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야 합니다. 염치 없이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분과 사귀는 것을 원하겠지만, 정상적인 인간 관계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줄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뵙고 나서야 저는, “받지 못하는 것도 큰 질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은 ‘나는 늘 베푸는 사람’ 이라는 자기 공명심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경우에 공통적인 것은 유난히 강한 자아(ego)가 그 뿌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자아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 신앙으로 자아를 더욱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신앙이 강해질수록 더욱 독선적이고 위선적으로 변해갑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해가고 성장해 갑니다.
자아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받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받는 일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 자아가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주는 일이 위험한이유는, 그 일을 통해 자아가 더욱 강해져 가기 때문이요, “나는 의롭게 살고 있다”는 의식이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병든 자아를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지 않으면, 주는 일이나 받는 일이나, 모두 우리에게 해롭게 작용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받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염치 없이 받기만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 자아를 포기한 사람들은 받는 훈련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려는 자아를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지하고 사는 유약한 존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면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어렵습니다만, 겸손히 받는 것은 우리의 영성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위로와 용기까지 선사해 줄 수 있습니다.
2.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부터 읽는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예수님의 고별설교’(Farewell Discourse of Jesus)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하신 말씀들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1장부터 12장까지를 ‘표적의 책’(The Book of Signs)이라고 부르고, 13장부터 21장까지를 ‘영광의 책’(The Book of Glory)이라고 부릅니다. 13장부터 21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야기를 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읽는 ‘고별설교’는 요한복음의 핵심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들이 이 안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는 분, 아낌없이 주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풀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주도록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당신의 마음 전부를 드려 사랑하셨습니다.
그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4절 이하에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한참 음식을 들고 계실 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은 이야기(12:1-8)를 말씀드릴 때 이미 설명드린 것처럼, 중동 지방에서는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 집에 노예(slave)가 있으면, 그를 시켜 손님의 발을 씻어주게 했습니다. 땀과 먼지로 덕지가 된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것은 노예에게 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을 때, 예수님은 노예의 위치로 스스로 내려 앉은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 시점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직 발을 씻지 않고 있었나?”라는 질문입니다. 보통 때라면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발을 씻었다면, 예수님은 씻겨진 발을 다시 한 번 ‘헹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종의 퍼퍼먼스(performance)를 한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자면, 일종의 ‘쑈’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경황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통 때처럼 모든 예를 갖추어 행동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 보면, 이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할 위기감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긴장해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마련한 비밀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는 발 씻을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발을 씻은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쑈가 아니라, 실제로 노예가 할 일을 자처하여 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또 다른 질문이 듭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도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절에 보니, 베드로의 차례가 되어 예수님이 그에게로 다가오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사실 질문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겁니다. “주님, 이러지 마십시오. 어떻게 주님께서 종의 발을 씻습니까? 종이 주님의 발을 씻어야지요. 제 발은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7절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나중’이라는 말은 언제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때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때,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실로 메시야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메시야는 낮아져서 섬기고 자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희생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섬기자,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여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행동으로써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퍼주는 사랑을 몸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3.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예수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분의 분위기에 짓눌려, 감히 거부의 몸짓도 하지 못하고 발씻김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만큼은 달랐습니다. 나서기를 좋아하고, 자주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충동을 제어할 줄 몰랐던 베드로입니다. 그는 도저히 그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 보다 돋보이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8절을 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자신의 발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8절)고 답하십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를 직역하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내 안에 들 수 없다”가 됩니다. 영어로 하자면,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in me”가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만일 발을 씻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베드로는, 마치 나무 가지가 나무 줄기로부터 떨어져 나가듯,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면, 발을 씻도록 허락하면, 베드로는, 마치 나무 가지가 줄기에 든든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발을 씻는 것이 뭐길래, 예수님은 이렇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발씻김을 통해, 당신이 종처럼 낮아져 그들을 섬기러 왔음을 상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겸손히 발을 내어 드리고 씻김을 받는 행동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면서 보여 주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손길을 피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보여주신 사랑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 없이, 그 사랑을 거부하면 그분과 상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당할터인데, 지금 내가 네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라. 만일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베드로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겁니다. “만일 발을 씻도록 맡김으로 주님과 하나될 수 있다면, 손과 머리까지 다 씻김을 받으면 얼마나 더 친밀해지겠는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앞서고 싶은 그의 욕심이 여기서 엿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10절입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씻느냐?”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많이 씻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도, 덜 씻는다고 해서 해로운 것도 아닙니다. 굳이 발을 씻기도록 맡기라고 요청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종처럼 낮아져서 보여주신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비로소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와 상관이 있게 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He or she has a part in Jesus!
베드로는 잘 하고 싶었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고 싶어서 행동했지만, 결국 계속 무안만 당합니다. 그냥 겸손히 그리고 묵묵히 예수님이 하자시는 대로 자신을 맡겼더라면 더 나았을 뻔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단정하는 태도가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예수님의 행동을 제어하려 했습니다. 8절 즉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에서 베드로가 사용한 언어를 보면, 그는 이 순간에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말고, 내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라고 대답하십니다.
4.
예수님이 그렇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셨다’는 말은 머리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체험으로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제자들을 위해 쏟아 붓고 가시려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신 다음에는 그 뜻을 알아차릴 것으로 알고 이렇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우직하게 믿고,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분의 손에 자신의 발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간에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여러분 각자를 찾아가 “네 발을 내 손에 맡기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도 알고, 그분의 부활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발을 내 손에 맡기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베드로보다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발을 씻어줌으로 그 사랑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발을 제 손에 맡기십시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당신을 위한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이미 그분에게 발을 맡겨 씻김을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그 놀라운 사랑을 잊지 않도록, 무릎꿇고 당신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는 주님을 늘 생각하십시다.
여러분 중에는, 베드로처럼, 이유는 다를지 모르지만, 발을 뒤로 빼면서 예수님의 손길을 거부해 오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것은 거북한 일입니다. 나의 더러운 발을 낯선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손길을 뿌리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깊이 깊이 감추어 온 마음의 참 모습을 하나님께 열어 보이는 것이 불편한 겁니다. 더럽고 무질서하고 찢겨져 있고 상처나 있는 마음을 누구에겐가 열어 보이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꼭꼭 걸어 잠그고, 나만 알고 그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더 잘, 더 세밀하게,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결국, 문제는 자존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존심을 버리기 꺼리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어 놓는 것이 실은 진정한 자존심을 찾는 일인데,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아를 하나님께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주님의 사랑을 겸손히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오, 주님, 제가 주님 앞에 항복합니다. 주님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 주님의 사랑에 제가 항복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혹은, 여러분 중에는, 베드로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예수님의 손길을 피하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한 사람의 희생이 가고 오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값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얽히고 설켜, 도대체 예수님의 손에 발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발 씻김을 받은 열 두 제자들 중, 그 뜻을 이해하고 발을 내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거쳐 오면서,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을 말끔히 해결하고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은 믿음으로써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해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구름떼처럼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발을 내민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여러분을 맡겨 보기 바랍니다. 그분의 손길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질 때,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의문들이 사라지며, 깊은 평안과 안식과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5.
저는 앞에서 “받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이다”라는 헨리 나우웬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또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받는 훈련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위에서 결정처럼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통해 내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겸손히 마음을 열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려운 일인 이유는 우리의 자아를 다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가장 중요한 일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희망 없는 삶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지금 우리 곁에 오셔서 발을 내밀라고 툭툭 치시는 예수님의 영적 현존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사랑을 받아들여 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치 어머니처럼, 우리의 냄새나고 더러운 발을 어루만지시며 씻어 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하여 그분의 사랑으로 치료되고 회복되어, 우리도 그같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다시 한 번,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다. 저 십자가는 우리를 향해 내민 예수님의 손입니다. 그 손에 우리의 발을 내맡기십시다. 마음에 있는 모든 질문과 의문을 일단 접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일단 우리를 맡기십시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되어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길은, 그 외에는 있지 아니합니다.
주님,
저희를 도우시어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주님의 손에 냄새나고 더러운 발을 내드릴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더러운 발을 씻으시고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항상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을 받아 치료받고 회복되어
저희도 참다운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아멘.
'좋은 말씀 > 김영봉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동행" (빌립보서 1:20-21) (0) | 2016.07.25 |
---|---|
"사랑에 당하다" (요한복음 13:1-11, 빌립보서 2:5-11) (0) | 2016.07.22 |
“영웅의 조건” ( 요한복음 12:27-50) (0) | 2016.07.18 |
"하나님의 대지에 심겨진 씨앗" (요한복음 12:20-26) (0) | 2016.07.14 |
"하나님 안에 살다" - 영생을 믿습니다 (요한복음17:1-3) (0) | 2016.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