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영웅의 조건” ( 요한복음 12:27-50)

새벽지기1 2016. 7. 18. 07:07

 

1.

 

2006년 독일 월드컵은 많은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끝이 났습니다. 우리 나라는 4강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힘썼지만, 아쉽게 2회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도 이번 게임을 통해 몇 명의 영웅들을 키워냈습니다. 참가했던 나라마다, 큰 활약을 했던 선수들 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챔피언 컵을 가져간 이탈리아에서는 영웅들의 개선 잔치가 요란하게 벌어진 모양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정말 영웅입니까?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저술가인 고든 리빙스턴(Gordon Livingston), 요즈음 사람들이 영웅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 전쟁이나 테러 공격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fallen heroes’ (‘희생된 영웅들’)라고 부르는데, 엄밀하게 따져 볼 때, 그 희생자들은 영웅의 카테고리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희생을 평가절하(underestimate)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희생은 실로 고귀합니다. 또한 그 희생이 값지게 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든 리빙스턴에 의하면, 영웅이란 두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마다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스스로 선택(right choice)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요,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sacrifice)을 끝까지 견디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영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영웅의 모습은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또한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관성 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또한 크든 작든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자발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무언가 이익이 되돌아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마땅히 영웅이라고 불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들에게서 진짜 용기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일찍 나이들어 버린,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2, 154)

 

옳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스스로 내가 영웅이 되겠다고 마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영웅의 자격을 잃습니다. 아무 욕심 없이, 아무 포부 없이, 그저 매사에 이웃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택하며 살아 갈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 진정한 영웅이 여기 있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월드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조국의 영예를 높인 선수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축구를 직업으로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발이 다 문드러지는 희생을 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훌륭하기는 해도, 영웅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 한 사람이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정명훈씨 한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서니,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을 성직으로 여기고, 그 일에 전념하여,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바라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웅은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개인적인 이익을 버리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일관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 안에 발을 딛고 서신 예수님은, 다가올 비극적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이 말씀의 첫 마디를 잘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 이 말씀은 시편 425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난에 직면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은 좀처럼 자기 내면의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는 법입니다. 특히 예수님같은 영적인 인물이 이토록 약한 심정을 제자들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사셨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동시에, 그분이 마주하고 있었던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을 내다 볼 때, 그리고 그것을 겪어내야 할 미래를 생각할 때, 그분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어디 안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신 것은 자신의 안일과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싶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28)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게 되기를 빌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는 응답이 들렸습니다. 그 응답이 제자들에게는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이 응답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다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셔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을 일관되게 그리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이웃을 위해 살아 온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이미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 저런 하나님이라면 내가 믿어볼 수 있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제 닥쳐올 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앞으로 모진 고난을 겪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우직하게 걷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길에서 하나님은 더 더욱 함께 하시어, 예수님이 그 길을 마지막까지 걸을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이웃을 섬겨 나를 높이기로 선택했으니, 내가 너와 함께 하여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겠다고 답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에게 주어진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고, 그렇게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영웅이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예수님처럼 영웅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분도 없어 보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분은 죄에 빠져 멸망해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드리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할 때, 그분은 당신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로 방향을 정하셨습니다. 그 이후, 그분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선택에 충실하셨습니다. 그 선택은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만, 그분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잠시 마음의 흔들림이 있었으나, 결국 극복하고 그 길을 끝까지 갔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영웅이 되어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오해하고 영웅으로 추켜 세우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만, 그 때마다 그분은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깨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얻고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드려 헌신했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당신을 메시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장차 무엇이 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하루 하루,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참된 영웅이시라는 말입니다. 살아 생전, 한 순간에 위대한 용기를 내어 큰 일을 한 영웅이 아니라, 전 인생을 통해, 하루 하루 일관되게, 똑 같은 걸음으로 이웃을 위해 살다 간, 참다운 영웅입니다.

 

3.

 

오늘의 말씀에서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요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님이 혼연일체(inseparable unity), 일심동체(united in heart and body)로 연합되어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4-45) 라고 말씀하십니다. 49절에서는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명령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껏 일관되게 말씀하시고 행동해 오신 것은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이끄시고 다스려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하면, 이 발언은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혹은 희대의 사기꾼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종교인들은 때로 말도 안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웃지 못할 뉴스를 보았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수녀 세 명이 2000년 초기에 British Insurance라는 보험회사에서 특별한 보험을 샀는데, 최근에 그 회사가 그 수녀 세 분을 불러 보험을 해약시켰다는 것입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올 때, 얼마나 위기감이 팽배했었습니까? 꼭 뭔가 일어날 것처럼 온 세상이 긴장하지 않았습니까? 그 즈음에 세 수녀가 이 보험사에 와서, “혹시 재림 예수가 내 몸에서 날 수 있으니, 그럴 경우, 예수님을 왕의 신분에 어울리게 키울 수 있도록 보장하는 보험을 사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 회사는, 매년 100파운드의 보험료를 내면, 재림 예수가 탄생했을 경우, 1백만 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의 보험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세 수녀는 6년 동안 보험료를 내왔는데, 늦게서야 이 사실을 안 가톨릭 교회에서 그 회사에 해약을 요청했답니다. 때론, 믿음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믿음을 미끼로 이익을 취한 그 보험 회사는 정말, 양심 불량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들은 그런 과대 망상증 환자나 할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배포 좋은 사기꾼의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삶이 그 말씀과 일치되지 않았다면, 그분은 둘 중 하나로 판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일관되게, 흔들리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한 걸음으로, 우직하게, 당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기 때문임을 증언해 주시는 겁니다. 그분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의 영 때문임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이끌리고 다스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이웃을 위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자신의 공명심(desire to be praised)을 부풀리는 일에 빠집니다. 아무리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해도, 다시금 영웅심 (desire to become somebody)에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순수해지려 해도, 어느 새 사심(selfish desire)이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걷고 싶지만, 틈틈이 유혹을 탐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붙들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분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4.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든 리빙스턴이 말한 영웅의 조건에, 하나를 더 덧붙이려 합니다. 진정한 영웅이란, 첫째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선택하고, 둘째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을 즐거이 그리고 변함 없이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조건이 온전히 충족되려면, 우리 인간의 본성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화해되고, 하나되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로잡혀, 우리의 본성이 변화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고, 그 방향으로 일관되게 걸을 수 있는 힘도 얻습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방향을 찾지도 못하고, 설사 찾았다 해도, 그 길을 끝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 “, 나는 영웅 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도 없습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제 걱정의 전부인데, 그 말씀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말씀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고든 리빙스턴이 말한 영웅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시대의 매스컴이 만든 영웅들 앞에서 우리는 자칫 낙심하기 쉽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괴감(self-pity)에 빠질 때도 많습니다. 혹은, 하루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처럼 살아가라는 부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하고 탄식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을, 제게는 면제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라고 탄식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영적 여행반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를 두고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 저는요, 상황을 대할 때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너무 분명하거든요. 제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행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겠는데, 제 마음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거든요. 저는 자주, ‘기독교인 하기(living as a Christian) 참 어렵구나!’하고 생각해요.” 이 고백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행할 능력이 없고, 심지어 그 뜻을 행할 마음도 없다는 것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 하기’,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몇년만 연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부담을 좀 줄여 주세요. 이대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해답은 앞에서 본 시편 425절에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 다시 찬양하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 다시 찬양하련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시편 421절에서 말하듯, “사슴이 타도록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나 우리 마음을 다스리실 때까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분의 영이 충만해질 때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이 그분의 영에 푹 잠길 때까지, 그분을 사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하게 하시어 예수님의 제자답게 하루 하루 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삶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5.

 

지난 주 목요일, 우리 교회 수양회 강사로 오신 김득중 교수님을 모시고, 이 지역에 있는 감리교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오전에 아주 진지한 세미나를 하고, 함께 점식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수고해 주신 교우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임에서, 저에게 배운 적이 있다는 젊은 목회자를 한 분 만났습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주 두렵고 떨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젊은 목회자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했는데, 그분들이 제게 대해 거는 기대가 매우 높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만일 김영봉 목사가 실족하면, 나는 순간부터 예수를 떠나겠다고 말하더랍니다. 금전 관계든, 이성 관계든, 세습 문제든, 어떤 면으로든 제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으로 알고 예수님을 떠나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저를 아는데, 제가 어떻게 이 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제가 책에서 주장하고 설교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바르고 깨끗하게, 정의롭고 진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의 길을 걸어가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그분보다 제가 더 간절합니다. 정말,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얼마나 유혹에 약하고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향한 이 높은 기대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제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지금껏 걸어온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진실하고 거룩하고 참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제게 있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나누어, 그분에게 더 온전히 사로잡히고 싶은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면, 오직 제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젊은 목회자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혹시 제가 실족하면,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제 탓입니다. 하지만 제가 믿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의지하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한, 저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6.

 

신학적인 면에서, 사상적인 면에서 그리고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제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분이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입니다. 그분은 촉망받은 탁월한 신학자였고 목사였는데, 인류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나치 정권에 대항해 싸우다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나치 정부에 의해 총살된 분입니다. 그분이 그 혼란의 시기에 남긴 몇 권의 저서는 두고 두고 읽는 사람들을 감화시켜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나를 따르라'(The Cost of Discipleship)'신도의 공동 생활'(Life Together)은 제 삶과 신앙과 목회의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분처럼 저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의 참된 제자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되게 살 수 있었던 힘도 역시 그분 자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저는 그분의 글을 읽고 알았습니다. 특히, 그분이 감옥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그분의 힘의 원천(source)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와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나누는 나의 대화가

어찌나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한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쾌활하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의 안전을 걱정만하는 무력한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해진 나

기력을 잃고 떠날 준비나 하고 있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는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이 으스스한 물음이 저를 조롱합니다.

, 하나님!

제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십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답게 살아가려면, 혹은 고든 리빙스턴이 정의한 참된 영웅으로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려면, 본회퍼의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 제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십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분의 소유가 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살았던 본회퍼처럼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작은 영웅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 이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