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25)

새벽지기1 2016. 5. 5. 07:47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dunamis)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사람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영역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로 이끄는 힘이듯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메시지 또한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케 하는 힘이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이 부름은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수단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나라로 부르시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6세기 종교개혁가 깔뱅이 잘 지적하였듯이, 하나님이 이방인을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하늘나라로 올라간 후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서 일어난다(『기독교강요, II.xi.12』)  사도들이 하는 일은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추어 볼 때,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역동적 메시지가 된다.  


복음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 하나님이 그 복음 안에서 일하기 때문이다(고후 3:7이하; 4:4-6). 복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포될 때 사람을 죄 용서함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성령하나님의 충만을 받아서 한 것이다. 그것은 높임 받은 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에서 말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력은 일반적인 뜻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복음을 듣는 사람마다 그것을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이 갖는 역동적 힘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선택받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적용된다.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미래 통치를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취한 그의 주되심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끝에 있을 하나님 나라는 이 현재적 주되심에 의해 보증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 선포와 율법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독일의 신학자 에벨링은 복음을 말씀 사건(Wortgeschehen)으로 본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에벨링이 율법을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에벨링이 율법을 구속사(Heilsgeschichte)에서 복음의 준비라고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이 율법의 기능을 복음에 대한 역사적 준비로 제한하는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복음을 “믿음의 율법”으로 본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기 때문이다(Church Dogmatics, IV/3, 393-7). 바르트에게 복음과 율법이 가지는 유일한 차이는 복음이 율법의 기원이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이해가 구속사에서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율법이 옛 언약에 속하는 것인데 반하여, 복음은 새 언약의 기초이다. 종말론적 구원이 선포될 때 율법은 끝을 맺는다(Systematic Theology, II, 506).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것은 복음을 율법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주석적으로 타당한가? 율법과 복음은 같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하지만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은 복음의 주된 내용인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관한 기쁜 소식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