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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리사적 관점으로 본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

새벽지기1 2015. 12. 8. 21:46

교리사적 관점으로 본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 


<피 영민 교수(역사신학)>



I. 서론 


1970년대 말에 중생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연구자는 그 후 약 10년 동안을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조만간 현실로 다가올 천년왕국에 대한 사상을 설교나 서적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주입 받았다. 그것이 "세대주의 종말론"이었다는 신학적 표제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것만이 유일하고 보수적인 성서적 종말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러한 확신은 1982년부터 85년까지 3년 동안의 침례신학대학원 과정의 교육내용을 통해서도 조금도 변경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1986년 미국 뉴올리언즈 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입학을 준비하며 M.Div. Special Student로 공부하고 있을 때 테리 영 박사(Dr. Terry Young)의 조직신학강의 각론으로써 종말론을 수강하게 되었다. 영 박사는 매우 조심스럽게 무천년설의 견해를 가르쳤으나 본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학설일 뿐 성서적인 종말론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목회현장에서 종말론을 설교하던 본 연구자에게 한 성도의 지나치는 비판이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1989년경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입각해서 강의하던 연구자에게 한 성도가 던진 도전은 왜 상징적인 요한계시록의 숫자를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무지한 성도의 불신앙적인 비판이라고 볼 수 없는 강력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연구자는 영 박사의 강의노트를 다시 읽어 볼 뿐만 아니라, William Cox, Anthony Hoekema, William Hendriksen, Gerhardus Vos 등의 종말론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형성하면서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성서적인 논리성이 전천년설에 비해서 훨씬 견고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목회하던 성도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종말론을 다시 가르치게 되었는데 목회 현실에서 성도들은 목회자의 신학에 큰 변화가 있음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구자 자신의 영혼에는 엄청난 변화였으며 신학적으로 다른 견해에 관해서는 스스로 충분한 연구를 하기 전에 비판적인 입장을 먼저 수용하게 된다면 자신의 신학적 편견을 수정할 길이 없다는 교훈을 깨닫게 하였다.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이 주로 세대주의 종말론이었음은 별도의 연구가 없어도 만인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그 이외에도 역사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 등의 다양한 선택가능성이 있음을 우선 인정해야 하고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기 전에 우선 그 주장의 내용을 듣고 교리적 묵상을 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종말론이 사람 개개인의 종말을 다루는 개별적 종말론(individual eschatology)와 인류 전체가 함께 맞게 되는 종말을 다루는 일반적 종말론(general eschatology)의 두 종류로 크게 대별되지만, 권혁봉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의 침례교회는 개별적 종말론에 관해서는 교단적인 견해가 일치된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영역은 천년왕국에 관한 해석을 포함한 일반적 종말론의 영역이다. 일반적 종말론에 관해서 한국침례교회가 믿고 가르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그 내용에 문제점이 없느냐,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이제는 심각하게 고려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침례교회의 종말론은 한국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존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또한 나아가서 침례교회라는 더 큰 배경 속에서 다양한 영향하에 형성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세계교회의 역사 속에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침례교회 종말론의 문제점과 방향성을 파악하려면 다양한 맥락 속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역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신학체계를 평가할 때는 그 신학의 성서적 근거가 무엇이냐를 먼저 파악해야 하지만, 나아가서 그 신학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떤 영향을 역사적으로 끼쳐 왔느냐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Ⅱ. 종말신앙에 관한 교리사적 수직적 관찰 


교리의 역사는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으로 대별될 수 있는데 한가지 교리적 관점을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관찰하는 것이 수직적 관점이며, 한 시대의 다양한 교리들을 하나의 시대상황 속에서 상호 비교하여 관찰하는 것이 수평적 관점이다. 교회의 종말신앙이 무엇이었느냐를 교리적으로 파악하려면 수직적인 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이 분야에 관해서 탁월하게 정리된 논문은 총신대 서철원 교수의 "공교회의 종말신앙"이라는 소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서 교수는 공교회는 종말론에 있어서 결코 오류를 범한 적이 없으며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결코 공교회의 신앙고백이 된 적이 없음을 확고히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천년설의 지상 천년왕국론이 역사상 지속적인 맥락을 유지해 온 이유는 불건전한 부흥운동과 항상 긴밀히 연결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른 신앙과 동반하는 부흥운동을 침례교회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평소의 확신을 가진 본 연구자에게 부흥운동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종말론 신앙의 역사적인 정통성 여부가 대단히 중요한 논의주제라고 사료된다. 


1세기의 교회는 신약교회로서 침례교회가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모델인데, 특정한 종말교회가 체계화 된 바 없고 단지 성도들은 열렬하고 현실적인 재림의 기대감을 가지고 삶의 거룩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2세기 교회에 이르러 주의 재림이 시간상으로 연장될 수 있다는 사상의 틈을 타고 지상천년왕국론이 일부 속사도, 변증론자, 고대 교부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스(Barnabas of Alexandria), 히에라돌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리용의 이레니어스(Irenaeus of Lyon), 카르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 of Carthage) 등의 교부들이 지상천년왕국을 물질적인 지복의 유토피아로 묘사하였다. 


아울러 2세기 후반에 일어난 몬타니즘(Montanism) 운동은 새예언운동(New Prophecy)을 자처하면서 177년에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Pepuza)에 그리스도가 여성 형태로 재림한다는 예언을 받았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몬타니즘 운동은 철저한 금욕주의를 표방하면서 방향을 선회하였는데 터툴리안이 이 그물에 걸려 지상천년왕국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2세기 천년지상왕국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2세기 천년왕국론자들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 지복론자와 다른 하나는 광신적 성령은사 신봉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지상천년왕국 사상을 가져온 것은 성경적 바탕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2세기에 많이 나타난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바룩서(Baruch)나 에스라 4서 등 후기 유대교 묵시록에 따르면 로마와 희랍문명의 부패가 극에 달하면 메시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 왕국이 건설되고 고통과 기근이 없는 지복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이런 묵시사상은 132-135년 사이의 시몬 바 코크바(Simon bar Cochba)의 독립전쟁으로 표현되었고, 로마제국의 가차없는 진압으로 인해 현실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2세기에 일어난 지상천년왕국성을 "실현되지 않은 유대인의 꿈"(Unfulfilled Jewish Dream)이라고 일축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지상천년왕국설은 영지주의자 세린더스(Cerinthus)의 거짓된 사기극으로 생각하는데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천년왕국설은 19세기에 일어난 세대주의와는 달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lism)이라고 불리운다. 


이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2세기 교부들의 신학사상이 과연 그 정도로 신뢰할 만한 성서성, 조직성, 체계성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평가가 먼저 선행된 연후에 의지할 만한 근거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2세기 교부들은 3위1체론, 기독론 등의 가장 중요한 교리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감안할 때 그들의 종말론도 큰 신뢰를 둘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목소리를 내었지, 그 사상에 동조치 않는 사람들은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설이 불건전한 형태의 예언운동과 결합되어 교회에 역기능을 야기하자 3세기 교회는 천년왕국 사상을 배척하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3세기 교회에서 몬타니즘의 천년왕국론을 적극 반대한 사람은 로마의 장로 가이우스(Caius)였는데, 로마의 감독인 히폴리터스(Hyppolytus) 조차도 가이우스의 영향으로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전기 천년설을 포기하고 천년은 상징적 숫자라고 입장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반대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이들은 상징적 언어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천년을 여자적으로(literally) 해석할 여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리겐의 제자인 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Great)도 애굽의 지상천년왕국주의자인 네포스(Nepos)를 반박하여 [네포스 반박문]을 저술하였다. 그는 232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0년 뒤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17년간 감독재임 중 갖가지 이단과 싸운 신학적 전사였다.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는 더욱 약화되었고, 교회가 국가교회화 되어 제도권의 중심이 됨으로써 핍박받은 현실에도 도피처를 찾으려는 2세기의 천년왕국설은 교회에서 추방되고 소수의 분파(sect)에 잔존하게 되었다. 


400년을 전후로 하여 아프리카 히포(Hippo)에서 목회한 어거스틴도 신학이 정립되지 못했던 청년기에는 한때 전기천년기설에 따른 적도 있었으나 [신국론]에 이르러서는 현대적인 형태의 무천년설을 확립하였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은 로마교회의 신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아무 저항없이 수용되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교회에서 전적으로 수용되면서 431년의 에베소 종교회의 네스토리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하면서 아울러 지상천년왕국설도 "미신적"인 사상으로 보아 정죄하였다. 


중세기 동안에 지상천년왕국설은 일부 신비주의적인 집안에 잔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특별히 독특한 역사철학을 제시한 요아킴(Joachim of Fiore)은 12세기의 이태리 피오레에서 제자들을 모아 수도화를 결성하여 독특한 역사철학을 제시했는데 역사는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의 3시대로 전개되며 1260년에 성령시대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성령시대가 되면 새로운 종단의 일꾼들이 일어나 전 세계의 개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였다. 그의 사상은 특별히 "영적 프란시스칸"(Spiritual Franciscans)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 가운데 스스로 성령시대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1260년에 이르자 시대의 종말이 이르렀고 새시대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운동이 스스로 자학과 고행을 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태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의 가담자들을 프레절런트(Flagellants)라고 하였다. 이 운동은 그 후의 세기에도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칼빈은 천년왕국설을 논박할 가치도 없는 유치한 이론으로 간주하고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을 충실히 받아들였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루터교의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년)도 지상천년왕국설은 유대교 사상이라고 하여 배척하였고, 개혁주의적인 신앙고백서는 거의 예외없이 천년왕국설을 거부하고 무천년설을 지지하였다(1566년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1년 Belgic Confession, 1563년 Heidelberg Catechism, 1560년 First Scotch Confession, 1615년 Irish Articles, 1647년 Westminster Confession). 


종교개혁기에도 지상천년왕국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주로 남부독일과 모라비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재침례교도(Anbaptists)들이었다. 1520년대 초반부터 쯔비카우의 예언자들(Zwikau Prophets: Storch, Drechsel, Stubner)은 터키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예수의 임박한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설교하며 꿈과 환상을 통해 받은 계시임을 강조했다. 그 영향을 받은 토마스 뮌쩌(Thomas Muntzer)도 성도의 혁명적 활동을 통해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종말론을 가지고 농민전쟁을 부추기다가 1525년 전쟁 중 목 베임을 당하였다. 


한스 후트(Hans Hut)도 1528년 오순절날 예수의 재림이 있으며 그 후 천년왕국이 올 것인데 종말론적 택자의 표식으로 성인침례(adult baptism)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트의 추종자들이 모라비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하면서 의로운 남은 자로 자처하고 경제적 공동체를 조직하고 재림을 기다렸다. 1533년부터 1536년까지 제이콥 후터(Jacob Hutter)가 이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후터파(Hutterites)라고 불리웠다. 


가장 중요한 시한부 종말론자는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이었다. 그는 1533년에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 나타나서 그 도시에 6개월 내로 예수재림이 이루어지고 천년왕국이 건설된다고 주장하다가 투옥되어 10년 뒤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혁명적 멜키오르파는 독일 뮌스터(Munster)에 몰려들어 얀 마티스(Jan Matthys)와 라이덴의 (Jan of Leiden)의 지휘아래 종말론적 정치, 사회를 건설하려 하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신의 복수를 집행한다 하며 잔인한 살인행위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광신적 행위가 153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1535년 6월 로마 카톨릭의 무서운 보복이 가해짐으로 그 모든 시도가 멸망하였다. 그 후 멘노 시몬스(Menno Simmons)의 지도를 받은 평화적인 재침례파는 시한부 종말론적 요소를 청산하였다. 


종교개혁기의 전천년설주의자는 대부분 불건전한 예언운동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행습이 전반적으로 불건전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근대기에 이르러서도 전천년주의자들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하여 발흥하였는데 첫째로 17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자들이 창시자인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부터 시작해서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였다. 신앙의 생동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가 실천적인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건주의의 신학자인 벵겔(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은 특별히 벵겔주석을 저술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숫자적인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여 1836년경에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독일에는 19세기에 이르러도 전천년설이 루터교 일각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독일 에어랑엔(Erlangen)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어랑엔 학파의 지도자들이 전천년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었다. 에어랑엔 학파는 루터파의 신앙고백적 유산과 새로운 학문과의 종합을 시도한 학파로서 학파의 진정한 창시자로 간주되는 호프만(Johann Christian Konrad von Hofmann)은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함으로써 19세기 루터파 교회안에 전천년왕국설이 유지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19세기초에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산발적으로 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는데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을 중심으로 한 어빙파 (Irvingites)와 미국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를 중심으로 한 밀러파 (Millerites)가 그들인데 대부분 불건전한 신학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19세기초에 영국교회에서 일어난 신학으로서 20세기 미국의 근본주의에 의해서 크게 확산된 사상은 달비(John Nelson Darby, 1880-1882)가 제창한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었다. 1827년경부터 플리머쓰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가입하여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종말론은 역사적 전천년설보다 더 복잡 미묘한 사상으로서 한국 교회 안에서 너무나 지배적인 종말론이 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미국의 성경사경회, 스코필드 관주성경 등을 통해서 확산되어 1910년 이후 일어난 미국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지배적 신학이 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 편협성, 공격성, 분열성, 반지성주의 등으로 인해서 백안시 당하면서도 체계성, 보수성, 선교지향성 등의 장점으로 인해 그 저변을 확대하였다. 


20세기에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와 루사스 러쉬두니 (Rousas John Rushdoony)와 그레그 반슨 (Greg Bahnsen)등을 중심으로 하여 미국 장로교 일각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재건주의(Reconstructionism) 혹은 지배신학(Dominion Theology) 혹은 신법주의 (Theonomy) 라고 불리우는 사상은 후천년주의를 주장한다. 후천년주의는 미국 청교도들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개혁주의 교회의 일각에서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적인 사회복음주의 운동 (Social Gospel)이 일종의 후천년설의 형태를 띠게 됨으로써 복음적인 후천년설과 혼동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복음적인 후천년설은 그 신학 구조상 무천년설과 다를 바 없으나 단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확대된다면 세상의 문화는 개선되리라는 낙관적인 문화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천년주의자들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맞추어 변혁하고 재건하려는 강한 문화변혁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뵈트너는 종말론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보았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두 종류는 지상천년왕국론자(Chiliast)로 분류하고,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은 지상천년왕국 반대론자(Anti-Chiliast)로 분류하려고 하였다. 이런 분류법으로 볼 때 역사상 교회의 주요한 흐름은 Anti-Chiliasm이며 Chiliasm은 분파성, 문화도피성, 분열성, 때로는 영적인 과열성을 지닌 집단에 주로 나타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교회 전반과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을 교리사적인 검토할 필요가 있다. 



Ⅲ. 한국교회 전반의 종말론적 경향 


이 주제에 관하여는 1992년 12월 기독교 학술원 세미나에서 합동신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김영재 박사가 "한국교회의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는데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교회를 막론하고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Chiliasm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교회는 전천년설 일변도의 교회임을 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교회에 전천년설이 지배하게 된 요인은 다섯 가지 정도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전천년설을 핵심적인 진리로 믿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 레이놀즈(Reynolds)가 전천년설을 가르쳤다는 점이 장로교 역사가들에 의해 명확히 증거되었다. 


둘째는, 1907년 장대현 교회 부흥사건 이후로 장로교 부흥사들이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말세론을 강해하면서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길선주 목사가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셋째로, 장로교의 초기 원로교수들이 조직신학과 주경신학을 통해서 전통적인 장로교의 종말론을 버리고 역사적 전천년설을 가르쳤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수와 주경신학자 박윤선 목사가 그 대표자로서 보수신앙은 전천년설이 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한국교회에 심어놓았다. 이들의 뒤를 이은 박아론, 차영배 두 교수도 전천년설을 계속 가르침으로 한국교회의 종말론을 전천년설로 고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심지어는 민중신학의 기수인 서남동 교수도 전천년설을 추종한 점은 기이하기까지 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복윤, 한철하, 이종성, 서철원, 신성종 교수 등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의 주요한 종말론 전통이 무천년설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넷째로, 20세기 후반에 세계적인 대부흥의 한 국면을 기록한 한국의 순복음교회가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임박한 재림론으로 큰 수확을 올렸다는 점이다. 시한부 종말론에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함으로써 혼란한 사회 속에 살던 한국인에게 소망의 빛을 던져주려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흥의 물결이 지나고 나면 부흥기의 비성서적인 요인들은 고스란히 후세대가 떠맡아야 할 부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부터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각종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이단집단들이 서식할 수 있는 최고의 토양을 형성했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종말론적 기대에 실망감을 느낀 성도들의 영혼에 종말론적 공백감과 불신감은 다시 한국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기에 큰 저해요인이 되었다. 


다섯째로, 대학생들과 교회의 청장년층에 교육과 제자훈련의 붐을 일으킨 각종 Parachurch 집단들이 대부분 탈신학화한 평신도신학을 표방하면서도 사실은 근본주의 신학을 그 내용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큰 비판없이 젊은 세대에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교회는 영성목회를 하든 교육목회를 하든 목회의 방향성에 관계없이 7년환란, 천년왕국, 휴거, 말세지말 등의 표현을 너무나 익숙하게 사용해 온 것이다. 



Ⅳ. 영, 미 침례교회의 종말론 


1. 영국침례교회의 종말론 


17세기 전반의 영국은 100권 이상의 종말론 서적들이 출간되었고 그 신학사상도 전천년, 무천년, 후천년설 등 다양했다. 또한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이나 영국의 내전(1642-1649) 등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천년왕국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법률적 개혁이나 심지어는 무력을 사용해서 지상천년왕국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들을 제5왕국론자(The Fifth Monarchists)들이라고 하였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네 짐승이 상징하는 국가들이 지나간 후 제5왕국이 곧 출현하리라고 믿었다. 제5왕국은 가난한 자들이 없고 대학이나 상류층이 폐지되고 실업자도 없고 건강하고 오래 살며 경제적 부요가 있는 왕국으로 묘사되었다. 독립파와 침례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 한설드 놀리스(Hanserd Knollys)나 헨리 제시(Henry Jessey)도 이에 가담했으며, 미국의 존 클락(Hohn Clarke)도 영국에 체류하던 중(1652-1663) 이 운동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윌리암 키핀(William Kiffin)과 토마스 콜리어(Thomas Collier)는 이에 철저히 반대하였다. 1660년에 찰스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제5왕국론자들의 소망이 사라지자 1661년 토마스 베너(Thomas Venner)를 중심으로 한 약 50명의 제5왕국론자들은 런던에서 4일간에 걸친 무력폭동을 일으켰고, 약 20명의 관리를 살해하였다. 찰스 2세는 이들을 진압하고 다수를 사형시켰으며 이로 인해 비국교도를 탄압할 구실을 얻게 되었다. 침례교회는 이 운동에 가담한 소수로 말미암아 불명예와 수난을 받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의 경우에서도 전천년설은 사회적 동요기에 유토피아적 환상을 주어 성도들을 동요케 하지만 그 결말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17세기에 나온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가운데 단 두 가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 지상에서 통치하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나는 1656년에 나온 섬머셋 고백서(Somerset Confession)이고 다른 하나는 1660년에 나온 일반침례교회의 표준고백서(Standard Confession)이다. 이 둘은 모두 제5왕국론의 환상이 만연하던 시기에 출현한 고백서들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신앙고백서는 천년왕국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거나 거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지상천년왕국설이 성립되려면 두 번의 부활, 두 번의 심판이 최소한도 요구되는데 이 고백서들은 모두 재림시 일반적 부활(general resurrection)과 일반적 심판(general judgment)을 말하고 있다. 


1611년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의 27개 조항의 고백서, 1612년의 존 스마이스(John Smyth)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제시한 100개 조항의 고백서, 1644년의 제1차 런던고백서, 1678년의 정통신조(Orthodox Creed) 1689년의 제2차 런던고백서가 그 실례인데 당시의 중요한 고백서를 모두 망라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 영국의 침례교회는 대다수가 공교회와 일치된 무천년설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침례교단안에 역사적 전천년설은 꾸준히 존재하여 왔는데 유명한 존 길(John Gill)과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스펄전은 결코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그는 세대주의는 의지적으로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한 성경귀절을 읽으면 읽을수록 교리화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하였고 "예언에 대한 연구에 시간을 소비하기는 필요한 재능도 없고 주님이 주신 사명도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하여 종말론에 관한 교리는 큰 확신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일부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주장된 역사적 전천년설을 큰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아울러 존 길이나 스펄전의 관심은 전혀 종말론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미국침례교회의 종말론 


18세기부터 미국 침례교회의 신학을 지배해온 신앙고백서는 1742년에 채택된 필라델피아 고백서(Philadelphia Confession)이다. 그 내용은 1689년의 영국 제2차 런던고백서와 동일한 것이므로 종말론에 관해서는 무천년설을 견지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권혁봉 교수도 "미국의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미국 남침례교회는 대다수가 무천년설자이다"라고 정확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 침례교회의 역사속에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산발적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근본주의가 대두되면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목회자들 가운데 종종 발견되지만 학문적으로 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정도이다. 특별히 근본주의자들은 남침례교회가 세대주의 종말론을 받아들이지 않자 남침례교단을 정죄하고 별개의 교단을 형성하여 분리되어 나가는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에 남침례교의 제도권 안에서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북부의 디트로이트(Detroit)와 남부의 달라스(Dallas)가 각각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교단내의 교리적 문제, 정치적 문제 등이 얽히고 설겨서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는 보수주의자라는 명목으로 북침례교회와 남침례교회에서 이탈해 나갔으나 사실은 역사적 근거를 가진 보수신학에 핵심이 있다기보다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진영을 가르는 표준으로 삼았다


북침례교회의 근본주의자들은 1920년에 The Fundamental Fellowship이라는 집단을 결성하여 북침례교회안에 머물며 교단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가운데 좀더 과격한 성향을 가진 근본주의자들이 북부, 남부, 캐나다의 근본주의자들을 모두 포함하여 The Baptist Bible Union(1923년)을 형성하였다. 캐나다 Toronto의 쉴즈 목사(T.T.Shields)가 회장이 되고 남부의 후랭크 노리스 (Frank Norris)목사도 가담하였다. 이 집단이 1933년에 개명하여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s Baptist Churches(GARBC)가 되었다. 북침례교회의 좀더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북침례교단안에 머물러 있다가 1947년에 분리되어 Conservative Baptist Association of America(CBAA)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콜로라도주 Denver에 1950년에 Conservativ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를 형성하였다. 


남침례교에서는 노리스(Frank Norris)가 가장 중요한 근본주의 지도자였다. 1909년에 텍사스주 Fortworth 제1침례교회 목사가 된 그는 강력한 설교자요 논쟁가이나 과격한 성격으로 인해 방화죄, 살인죄 등 법률적인 문제에 연루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침례교회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성 있다고 공격하다가 도리어 텍사스 주총회와 남침례교 총회로부터 제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931년에 Fortworth에 Premillennial Baptist Missionary Fellowship (PBMF)을 구성하여 독립교단이 되었다. 1939년에는 Bible Baptist Seminary (성서침례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노리스는 교단이름을 1950년에 World Baptist Fellowship(WBF)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운영을 둘러싸고 노리스의 독선적 성격에 반발한 집단이 1950년에 분리되어 미주리주 Springfield에 본부를 두고 Baptist Bible Fellowship(BBF)를 형성하였다. 노리스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디트로이트 출신의 비크(G. Beauchamp Vick)가 주축이 되어 Springfield에 Baptist Bible College를 설립하였는데 유명한 제리 폴웰(Jerry Falwell)을 배출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BBF는 가장 큰 근본주의 교단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따르는 근본주의자들은 북침례교단과 남침례교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노선을 걸었고 양 교단의 종말론을 지배하지 못했다. 물론 일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따르는 목회자들이 교단내에 머물러 있기는 하나 신학적 주류가 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달라스 제일침례교회 목사를 지낸 크리스웰(W. A. Criswell)이다. 


선교사로서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도 지냈고 수도침례신학교 학장도 지낸 바 있는 하명도 박사(Malcolm O'Neal Hester)는 "1900년 이후 남침례교 사상의 천년왕국설"이라는 논문에서 무천년설의 주장자로서 레이썸머스(Ray F. Summers), 에드워드 맥다우웰 2세(Edward A McDowell, Jr.), 러셀 존스(Russell Bradley Jones), 모리스 애쉬크래프트(Morris Ashcraft), 레이 로빈스(Ray Frank Robbins)를 들었는데 이들은 모두 남침례교 주요 신학교의 교수들이다. 후천년설의 주장자로서는 서남침례신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낸 캐롤 박사(Benajah H. Carroll)를 들었다. 전천년설주의자로는 세대주의자로서 크리스웰을 들었고,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로서는 자신의 논문 지도교수인 데일 무디(Dale Moody)를 들었다. 그의 연구 대상자 가운데 숫자적으로도 압도적으로 무천년설 주장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Ⅴ. 한국 침례교회 종말론의 경향 


한국의 침례교회도 종말론에 관한 한 영·미 침례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기보다는 토착적인 한국적 종말론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침례교회 종말론 형성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동아기독교를 창시한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의 종말론은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 신학의 기본토양을 형성하였는데, 김용복 교수의 논문 "성경공부에 나타난 펜윅의 종말신앙"에서 이를 자세히 다루었다. 김 교수의 결론은 펜윅 선교사는 성경공부의 핵심을 재림신앙을 공고히 하는데 있었으며, 펜윅의 종말론에 대한 조직신학적 평가는 그가 철저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입각하였다고 보았다. 펜윅은 이를 미국 보스톤의 클라렌돈가 침례교회 목사인 고든(A.J.Gordon)에게 배웠으며, 사상적으로는 스코필드(Scofield)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펜윅은 긴박한 종말신앙을 유지하기는 하였으나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에는 빠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의 종말론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이 있다면 말세신앙으로 인하여 일제의 혹독한 박해와 고난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며, 부정적인 영향력이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분리정신이 지나쳐서 2세들의 기본교육을 등한시하였다는 점이었다고 김교수는 분석하였다. 


한국의 침례교회는 동아기독교 시대를 거쳐 미국 남침례교회의 선교가 시작된 이후에도 종말론에 관한 한 펜윅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을 유지하였다. 물론 일제의 박해는 중지되었지만 전쟁과 각종 혁명, 가난과 독재 등의 시련을 임박한 재림의 기대를 가지고 견디어 나갔다. 2세들의 교육에 관해서는 더 이상 펜윅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았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 부정적인 세계관은 침례교 목회의 지속적인 약점이 되었다. 곧 망해버릴 세상이요 문화인데 개선하려고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식의 세대주의 종말론의 세계관은 "빠져가는 선박의 남은 부분에 페인트칠한들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로 표현이 되었다. 성도는 7년 환란이 오기전에 휴거된다는 환란도피주의는 문화창조, 문화개혁의 도전적인 정신보다는 문화기피의 영지주의적, 재침례교도적인 영성을 낳았다.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비판없이는 21세기의 청년세대를 지도할 수 없고, 한국 사회속에서 침례교회의 위상을 높일 수 없다고 본다. 


둘째로, 부흥운동을 통해서 능력받은 부흥사들의 종말론은 부흥설교를 통해서 개교회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침례교회 역사의 오순절은 1960년 8월 계룡산 정상의 "삼신당 집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침례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목회자들은 남침례교 선교부가 지급하는 소액의 선교비로 연명했으나 그나마 끊어질 지경이 되자 산상기도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계룡산 양정고개 산기도원에는 "세계기도동지회"라 불리우던 일군의 목회자들이 산상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부산 시온중앙감리교회 목사이던 정영문 목사는 성경 영해를 통해 은혜를 끼침으로 일명 정 영해라 불리웠고, 세도장로교회의 정덕진 목사는 성령론을 강조하며 성령의 은사와 불을 받으라고 부르짖었다. 이 두 목사는 교단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재침례 운동을 전개함으로 침례교 목회자들과 유대를 가졌다. 개인적으로 계시받은 종말론을 강조하고 가르치던 이유성 목사는 일명 이뢰자라고 불리웠는데, 초기에 "세계기도동지회"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재림론으로 말미암아 분리되어 별개의 운동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뢰자 목사는 정상적인 기독교에서 이탈되어 조속히 사망하고 그의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서적으로 출간하였는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골격에 독자적인 신비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보인다. 


양정고개 산기도원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오관석 목사와 삼신당 집회의 금잔디밭 집회에서 성령이 권능을 받은 김충기 목사는 1960년대 초반부터 침례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부흥회의 주역이 되었다. "세계기도동지회"의 영향력은 계속 확대되어 침례교단의 고승혁 목사, 최보기 목사, 안중로 목사, 이창희 목사 등의 영향력있는 부흥사들을 배출하였다. "세계기도동지회"의 3대 신학 강조점은 성령론, 인격론, 종말론이었는데 종말론은 이뢰자 목사의 신비적인 요소를 배척하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골격을 유지하였다. 휴거의 시기가 환란 전기냐 환란 중기냐의 약간의 시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골격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벗어나지 않았다. 말세지말을 당하여 지정의가 갖추어진 바른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마귀와 세상과 죄를 이기는 승리자가 되자는 메시지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일부 부흥사들은 주로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부흥운동에 종말론도 펜윅 이후 동아기독교의 종말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셋째로, 부흥회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일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교육목회의 종말론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침례교회의 교육목회는 주로 Parachurch 운동의 영향권 아래서 형성되었는데, 전술한 바와같이 Parachurch 집단들의 종말론이 근본주의적인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교육목회에 접목되기 용이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옹호하는 서적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어 나왔기 때문에 교육을 위한 자료수집이 손쉬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로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체계적인 명확성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에서 체계있는 신학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평신도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을 교회역사와 시사성 있는 사건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용이성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넷째로는, 종말론 사경회 등을 통해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에서 주강사로 다니는 목사들이 그림, 차트, 도표 등을 이용하여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시각화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미국의 성서침례교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목사들이 남침례교회와 성서침례교회의 개념구별이 약한 한국침례교회에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소개한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침례신학대학교와 수도침례신학교 및 총회의 목회자 성장대회 등에 강사로 나오면서 교육목회를 지향하는 젊은 교역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천년"이라는 숫자를 충만수인 10의 세제곱으로 최고의 충만수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충만히 완성되는 기간이요 교회시대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별도의 지상천년왕국을 주장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이론을 형성할 필요도 없고, 천년왕국의 임박성을 강조할 필요도 없으므로 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20세기 내내 그 목소리를 높여왔고, 예수님의 재림과 지상천년왕국이 곧 올 것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시한부 종말론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근접한 인상을 주었고, 여기에 약간의 특별한 개인적 계시를 가미하면 쉽사리 1992년을 풍미한 이장림목사의 다미선교회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구원파와 같은 이단집단도 세대주의 전천년설에는 완전히 동조할 뿐 아니라, 세대주의를 주장하는 수많은 서적들을 출간하여 성도들을 미혹하였다. 물론 세대주의 종말론으로 인하여 교회가 생동감을 얻고 성도들이 신앙의 긴박감을 얻고, 현실의 고통을 이기는 소망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나, 그 부정적 요소의 결과는 숫자적 부흥이 지나간 후 세대가 떠 안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한국침례교회의 종말론을 논하자면 침례신학대학교의 교수진의 영향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침례신학대학교의 초대 조직신학 교수였던 지대명(Albert Gammage) 박사는 선교사로서 종말론에 관한 한 남침례교의 전통적인 무천년설을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일회성, 재림시 일반적 부활과 일반적 심판이 있음을 가르쳤고, 천년을 문자 그대로 일정한 기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완전이나 완성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권혁봉 교수는 "상당수의 그의 문하생으로서 교단의 목회자가 된 사람이 무천년설의 주장자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본 연구자가 어느 침례교회에서 무천년설에 입각한 본문강해를 하였을 때 그 교회의 담임이신 선배 목회자는 그 내용을 들으니 지대명 학장이 가르친 바와 같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뒤를 이어 종교철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했던 권혁봉 교수는 멀린스(E. Y. Mullins)의 [조직신학 원론]을 번역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는데 멀린스는 명백히 무천년설을 가르쳤다. 천년전기론과 천년후기론을 모두 비판하고 최고도의 상징적인 단일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대부분의 사실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못을 박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권혁봉 교수 자신이 멀린스의 무천년설을 그대로 따랐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종말론에 관한 소고"를 집필하던 당시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관해서는 비판적인 듯하고, 무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을 침례교의 종말론으로 인정하나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선호하는 인상을 받았다. 


권혁봉 교수의 뒤를 이어 조직신학을 강의한 도한호 교수는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의 [조직신학]을 교재로 사용하지만 종말론에 관한 한 멀린스의 무천년설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단번의 재림과 심판, 영복, 영벌이 있다. 천년왕국은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화의 상태를 말한다"고 그의 강의노트(1998년 7월)에서 결론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전천년설과 환란후기 재림설(Postribulationism)을 주장하였다. 요컨대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했다는 의미이다. 


선교사로서 잠시 조직신학을 강의했던 하명도(Malcolm Hester) 박사는 자기 스승 데일 무디(Dale Moody)를 따라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가르쳤다. 


달라스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강사로 여러해 강의한 장두만 박사는 근본주의 노선을 따라서 전형적인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강의함으로써 침례신학대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주장을 문하생들에게 심어주었다. 


물론 조직신학을 강의하지 않는 교수들도 나름대로 종말론에 관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서신학이나 역사신학 분야는 무천년설이 강한 듯 보이고, Parachurch 운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교육학이나 실천신학분야의 교수진들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경향이 강한 듯하나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이지 조직적인 체계로 강의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침례신학대학교의 종말론은 다양했기 때문에 교단에 일관성 있는 지도력을 제공하기 어려웠다고 보인다. 목회자들은 목회 현실 속에서 스스로 조직신학의 체계를 선택하고자 노력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가장 손쉽게 사용하고, 교육에 활용할 수 있으며 널리 통용성이 있었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 



Ⅵ.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침례교의 종말론은 전반적으로 전천년설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세대주의로 말미암아 부흥목회와 교육목회를 막론하고 숫자적 부흥과 함께 생동감있는 영성을 유지하는 면에 있어서 한국의 침례교회는 큰 유익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엄격한 개념차이를 크게 분별치 않는 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큰 차이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어떠한 신학체계를 평가할 때 그 신학이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어떤 유익을 주었느냐하는 부흥주의적 안목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신학체계가 조직신학적으로 일관된 체계성을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안목으로만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도의 체계성을 유지하고도 성서에서 벗어난 신학체계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체계를 평가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수립하는데 있어서는 교리사적 안목에서 판단할 필요도 절대적으로 크다고 본다. 


침례교회를 위시해서 한국의 침례교회를 지배해 온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의 공통된 특징인 지상천년왕국설과 임박한 재림론은 부흥주의적 관점이나 체계신학적인 안목에서는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교리사적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로, 전천년설은 교회전체의 전반적인 흐름이 무천년설에 있다고 볼 때 교회의 중추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사상이다. 사회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가난에 시달리고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분파들이 전천년설을 추종했던 교회역사의 흐름을 볼 때 각종 전쟁, 혁명, 일제핍박, 독재핍박, 가난, 질병 등과 싸워온 20세기의 한국교회가 전천년설을 선호한 것은 당연한 사회적 현상이다. 그러나 극심한 환란의 시기를 어느 정도 통과해 온 21세기까지 20세기의 의식구조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현실적으로 21세기의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메시지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도 과감히 신학의 페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를 시도해야 한다. 교회의 전통적이며, 특별히 개신교의 지배적인 종말론인 무천년설에 신학적 관심을 돌려야 하며 종말론에 대한 교리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의 영혼을 충족시켜 줄 메시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침례교회의 전천년설은 영국과 미국침례교회의 전통적인 종말관인 무천년설에서 벗어나 있다. 역사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이, 혹은 편파적인 근거만을 가지고 "침례교의 종말론은 전천년설이다"라고 가르쳐서는 안될 일이다. 한국의 침례교회가 침례교 역사의 주류를 뛰어들기 위해서는 무천년설에 대한 목회자 재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셋째로, 한국의 침례교회를 위시해서 한국교회 전반이 후천년설에 대해서 무지하며 무지한 상태에서 비판을 함으로써 후천년설이 갖는 장점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후천년설 주장자들 가운데는 인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사회복음운동에 기운 사람들도 있지만, 건전한 복음주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후천년설의 적극적인 세상 개혁정신은 미국의 청교도들로 하여금 강력한 사회봉사정신을 갖게 하였다. 신학구조상으로도 무천년설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 후천년설이며 단지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점이 다를 뿐이다. 


넷째로, 종말론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에 따라서 다양하므로 어떤 사상이든지 아무 관심이 없다는 형태의 종말론 무시적 태도 (Attitude of Total Neglect)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분야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성도의 소망을 설명하는 핵심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주장이 가장 합당한지를 책임성있게 검토하는 태도 (Attitude of Responsible Treatment)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21세기 한국의 침례교회는 20세기의 Chiliasm을 벗어나 무천년설의 신학체계와 후천년설의 세상 개혁의식을 배워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출처: 창원 늘푸른 교회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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