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등과 같은 이단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기성 교회의 문제점들을 거론하며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기성 교회의 문제가 많은 때에는 문제 몇 가지만 열거해도 일반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통달케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 없거나 막연하므로 그들의 논리를 도저히 이길 수 없고, 말려들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빌 3:15) 우리 모두는 ‘온전히 이룬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가?”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대답하셔야 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글쎄요.”나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따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된 것입니다.
“예, 하나님을 가장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이제부터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엄마는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녀는 성장하여 제 몫을 다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그 사랑에 머물러 있으면 집착하는 엄마와 마마보이가 양산될 뿐이며,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여정에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푯대, 즉 방향을 말합니다. 그 방향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사람도, 또 대부분의 이단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를 향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방향이 중요합니다. 가더라도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야 합니다.
두 가지 잘못된 방향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입니다.
유대주의자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인데, 교회에 들어와서도 유대교 율법을 여전히 시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별로 나쁠 것 없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므로, 엄격한 율례의 시행은 오히려 경건한 종교 생활에 더 유익해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절대로 용납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주상의 성자로 알려진 시몬은 388년에 태어난 매우 경건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70cm의 높이 기둥에서 수도를 시작하였는데 그 목적은 악한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둥의 높이가 점점 높아져 나중에는 40m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위에서 35년간 수도하며 살았고 그 기둥 위에서 죽었습니다. 사는 동안 그를 만나러 수많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여자는 어머니라도 가까이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계율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이 시몬이 유대주의자의 가장 두드러진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삶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삶일까요?
또 다른 잘못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헬라주의자(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헬라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헬라 철학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과 기독교를 헬라 철학의 틀 안에서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등등 이름만 들어도 헬라 철학이 얼마나 탁월한 이론과 정교한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철학 문외한이라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과 학문은 헬라 철학 체계를 바탕으로 발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도 헬라 철학의 이론과 논리를 차용하여 그 교리 체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한 헬라 철학으로 예수님과 기독교를 해석하려는 것이 왜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일까요?
헬라주의자(영지주의자)의 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일순간에 사하여지고 육체까지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이 임합니다. 이 교리들은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와,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다는 논리로, 내키는 대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 그들은 교리와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들어보니 타당한 것 같았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이 탄식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모든 종교에는 계율과 교리가 반드시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도들을 훈련시켜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계율과 교리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되는 경우 그 계율과 교리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기독교 자체도, 교회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이단 자체가 목적입니다. 자신들의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 집단의 강화와 세력 확장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기에 속한 자들은 모두 그 집단의 하수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수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자랑스러운 자녀로 세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겠다고 열심을 다하다가, 종교 계율에 갇혀 포로된 자, 종교의 논리와 교리에 갇혀 눈이 먼 자를 해방하고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신앙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물을 보도록 하나의 안경 즉 예수님의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예수님의 생각을 내 것으로, 예수님의 삶을 내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믿음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성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빛과 하나님의 에너지를 얻고, 우리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성품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믿음이 깊어짐에 따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성품의 인간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곧 온전히 이룬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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