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믿음
지난 설교에서 ‘완전하라.’는 말이 실제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열린 태도를 취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인간 행위에 대한 율법적인 접근과 복음적인 접근의 차이가 놓여 있다. 율법적인 접근은 인간 행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을 찾는 것인 반면에 복음적인 접근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천착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을 찾는 것이다. 전자는 윤리에, 후자는 믿음에 무게를 둔다.
예수는 마 7:15절 이하에서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서 이 문제를 설명한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윤리에 우선권을 둔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아니다. 예수의 입을 빌려서 마태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변증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태 공동체는 율법을 지키라는 강요를 유대교로부터 받았다. 유대 기독교가 율법을 등한히 한다는 비판이다. 자신들을 변호하려면 당연히 율법을, 즉 열매로 표현된 행위를 강조해야 한다.
예수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놓고 본다면 예수는 믿음을 강조했지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다. 행위는 위선에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은 그들이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 바람직하게 보이는 행위가 결국은 위선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윤리(행위)와 믿음(존재)의 관계는 마치 열매와 나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믿음이 우선이지만,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는 윤리가 우선이다. 교과서적으로 정리하면, 행위 없는 믿음은 삶의 무게가 없는 값싼 관념에 떨어지고, 믿음 없는 행위는 경박한 행동주의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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