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여호와의 종 (사 42:1-9)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6. 1. 15. 05:39

 주현후 1, 2026년 1월 11

 

 

정의로운 세상

 

 42:1-9절에 나오는 내용은 구구절절이 은혜가 넘칠 뿐 아니라 매우 강력한 힘이 느껴집니다. 이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고대 유대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때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패망한 뒤에 많은 사람들이 포로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니까요. 바벨론 유수 시절의 유대 동족에게 선포한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키워드를 고른다면 정의입니다. 1절과 3절과 4절에서 반복하여 정의 세운다고 강조했습니다. 1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종으로, 즉 자기 일꾼으로 택한 사람의 할 일은 세상에 정의(justice)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기원전 550년쯤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을 염두에 둔 말씀이라고 합니다.  44:28절은 고레스’(키루스) 내 목자라고 표현했고,  45:1절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새로운 제국의 왕까지 나의 종으로 세운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고레스는 훗날 바벨론 제국을 무혈 정복한 다음에 포로로 잡혀 온 여러 민족을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유대민족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대인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세상에 정의를 세워나가는 이가 바로 여호와의 종이라고 본 겁니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세상은 왜 정의로워지지 않는 걸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을 전달받은 고대 유대인들은 실제로 정의롭게 처신했을까요? 특히 가자 지구를 파멸 지경까지 몰고 간 지금의 이스라엘은 정의로운 국가일까요?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은 세계 정의에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나라일까요? 정의를 향해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을까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정의보다는 지금 당장 경쟁에서의 승리가 급선무인 이 세상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거룩한 상상력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은 대충 공자왈 정도로 여긴 채 사는 게 편하긴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실제로 삶의 기쁨과 영혼의 만족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이사야가 실제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2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종은 외치지 아니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한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보란 듯이 떠벌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세우시고, 자신은 그저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세상 정치 지도자들은 반대의 특징을 보입니다. 더 소란스럽고 떠들썩하고, 우쭐대기를 좋아합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기를 과장합니다.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가 행해야 할 정의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 신경을 쓰다가는 나라와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보는 겁니다. 상한 갈대는 빨리 꺾어버리는 게, 꺼져가는 등불은 빨리 꺼버리는 게 전체를 위해서 낫다고 말입니다. 좋게 말해서 실용주의 정의론이고, 나쁘게 말해서 편의주의 정의론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힘의 논리로 작동합니다. 여러 가지 힘의 논리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며, 그리고 결국 그 불편한 상황을 외면하거나 타협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쩔 거냐, 하고 말입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이사야가 살던 당시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와의 친밀한 관계

 

4절에 따르면 이런 현실 앞에서도 여호와의 종은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운다.”라고 합니다. 현실이 어둡거나 칙칙하거나 부조리하고 모호해도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갑니다. 정확하게는 자기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처럼 어떤 답답하고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려면 자기를 택하신 여호와가 누군지를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제 영혼의 깊은 곳에서 강력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루아흐)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핵심 단어가 하늘, , 소산, 호흡, 영입니다. 뻔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으나, 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늘을 종종 쳐다보시나요? 땅과의 친밀감을 느끼시나요? 중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걸어보신 적이 있나요? 본문은 소산, 그러니까 먹을거리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라서 돈으로 계산이 안 됩니다. 본문은 호흡까지 거론합니다. 만약 돈으로 공기를 사서 숨을 쉬는 때가 온다면 그게 바로 지옥이겠지요. 지금 우리는 거의 무한정 값없이 숨을 쉽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귀한지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돈 되는 것만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 논리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영이라는 히브리어는 루아흐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생명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루아흐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지구에 바람이 없다면 생명 현상은 불가능합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유독가스는 제자리에 머물고, 구름 역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류 활동이 활발하기에 지구는 거듭해서 살아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도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생명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약동하지 않고 고착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계에 머물거나 잘해야 그냥 동물에 머물 겁니다. 실수를 해도 우리가 인간인 이유는 영이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는 아무리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영적 존재가 아니라 똑똑한 계산기에 불과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의 시점이 멀지 않았다고 그쪽 전문가들이 주장하기는 하나, 실제로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인공지능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에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그 이 얼마나 고유한 생명의 능력인지를 더 깊이 선포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준비가 없으면 교회는 인공지능이라는 쓰나미에 정처 없이 떠내려갈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위에서 설명한 바로 그 여호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희망하기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의 종으로 삽니다. 영혼의 품위를 유지합니다. 이와 달리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여호와와의 관계가 느슨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영혼의 품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정의를 외면합니다. 사리사욕에 떨어지고, 쉽게 쇠하고 낙담합니다. 아니면 고집불통이 됩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서울 한강 가 잘 나오는 위치의 100억짜리 고급 아파트 거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집주인이 있습니다. 그는 대형 화면으로 나오는 티브이에서 싸구려 드라마나 온라인 쇼핑몰이나 재테크 방송에 넋을 잃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바로 그의 인격이고 삶입니다. 그곳에 집안 살림을 돕는 도우미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설거지를 하면서 물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자신이 청소기를 조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놀라워합니다. 이런 것들이 생명의 원초적이고 신비한 능력입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인간다운 품위를 누리고 사는 걸까요?

 

본문 6절은 그 사람을 여호와께서 의(righteousness)로 불렀다고 표현했습니다. 생명의 영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위에서 비유로 든 도우미처럼 시원적인 차원에서 영혼이 풍요로워집니다. 그의 내면이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축소되고 여호와의 영만 충만해집니다. 마치 예술가에게 자기는 축소되고 예술적 영감만 충만해지듯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디서 정의를 실천해야 할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시각 장애인, 갇힌 자, 흑암에 앉은 자는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이들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입니다. 여기에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이 인간다운 품위를 회복할 때 실제로 정의가 실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전체 흐름에서 보면 인간에게서 정의로운 세상은 넘사벽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실현되지도 않습니다. 오늘 21세기도 정의는커녕 이전투구의 수렁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정의를 향한 이사야의 외침은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런 때(카이로스)가 온다는 뜻입니다.

 

의로움의 근거인 예수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당신이 그리스도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다시 가서 전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면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5)  12:17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안식일 문제로 신변에 위협을 받을 때 오늘 설교 본문에 해당하는 사 42:1-4절이 인용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 회당에 들어가서 읽은 구약성경이 사 61:1절 이하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4:18, 19) 초기 그리스도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서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인데, 실현되었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국제법까지 무시하면서 안하무인처럼 좌충우돌하는 트럼프의 미국과 비슷했던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거꾸로 로마 제국을 무너뜨려야만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을 확 바꾸고 싶다는 열망으로 예수께 왔다가 실망해서 떠난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눅 6:20 이하를 따르면 예수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을 전복하는 말씀입니다. 1)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 2) 굶주린 자가 행복하다. 3) 우는 자가 행복하다. 4) 박해받는 자가 행복하다. 인생을 망쳤다고 여기는 운명에 떨어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의로운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삶의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에 마음을 두는 삶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려면 세상과의 관계는 줄여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마음을 둘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자이고 굶주린 자이고 우는 자이고 박해받는 자입니다. 이를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죽음을 일상에서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그제야 소소한 사물까지 거룩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당연히 시각 장애인과 갇힌 자와 흑암에 앉은 자들이 인간다움을 찾는 일에 서로 마음을 모아서 연대하고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평화)로운 삶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칭의론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이냐에 상관없이, 얼마나 세상이 민주화되었느냐에 상관없이 인간 삶의 품위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딸과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정말 맞는 말인가요? 종교적 말장난인가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세상의 불의 앞에서 침묵하라는 뜻일까요?

 

그런 문제는 여러분 각자가 실존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만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앞을 못 보는 이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자아라는 감옥에 갇힌 이는 거기서 풀려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평화의 기운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흑암에서, 요즘 표현으로 심한 우울감이나 강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런 경험으로 인한 영혼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2026년에는 여러분에게 더 충만하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