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회개와 하늘나라 (마 4:12-23)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6. 1. 27. 06:54

주현후 3, 2026년 1월 25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공적 자리에 나서게 된 동기는 세례 요한과 관계가 깊습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1:14-15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의 이 보도를 마태복음도 그대로 끌어왔습니다. 다만 요한의 체포와 예수의 하늘나라 선포 사이에 마태복음만의 관점을 보충했습니다.  4:12절에 따르면 요한이 체포당한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갔다고 합니다. 신상의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몸을 숨긴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렛에서의 활동에 관해서는 본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다시 2시 방향 48킬로미터 떨어진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당신 자신이 집을 얻었는지, 지인의 집을 빌렸는지는 자세하게 모릅니다. 예수의 초기 활동이 주로 가버나움에서 상당한 기간 이뤄졌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아예 이사를 했다고 보는 신약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어촌인 가버나움에 살게 된 이유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4:15-16절은 그곳에 사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빛이 비치게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 다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선포를 전합니다. 마가복음과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회개하라!

 

이 문장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개하라.”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저렇게 외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저 사람은 광신자라고 손가락질하거나, 지금 자기 인생은 잘 풀리고 있는데, 뭘 회개하라는 거지, 하고 따질 수도 있고, ‘너나 잘해 하고 비아냥댈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저런 말씀을 왜 공생애 첫 메시지로 선포한 것일까요? 우선 회개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봅시다.

 

회개하라’(Μετανοετε)라는 단어는 명령형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회개’(μετάνοια)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메타노이아는 μετά(...를 넘어) νοια(마음)의 합성어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기보다 미래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 강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초점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가 힘든 이유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과거에 매달려서 살고,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빛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두 사태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나쁜 뜻으로나 좋은 뜻으로나 과거에 매달리니까 미래의 빛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미래의 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를 자랑하거나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사는 겁니다.

 

예수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회개하라는 예수의 말은 자신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를 향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8:9절 이하에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죽은 듯이 기도를 드렸으나 바리새인은 자기가 토색, 불의, 간음 하는 이들이나 세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감사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업적을 나열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그들의 인격과 품성이 뻔뻔해서 그렇게 기도한 게 아닙니다. 당시에 자타가 모두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자랑할 거도 많고, 감사할 거도 많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는 율법이 올바른 삶의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의 종교적 권위에서 왔습니다. 당시 누가 모세의 권위를 거스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근거로 자기와 세상을 판단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든 사법적 판단을 법원이 내리는 거와 같습니다. 법적 권위를 독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사람들을 모두 율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는 기득권이었기에 그걸 놓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걸 놓으면 자기 삶 자체가 부정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회개가 힘든 겁니다.

 

물론 율법은 인간 사회에서 폐기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라도 도덕과 윤리를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이니까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게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특히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어떻게 기도 시간을 지킬 수 있나요. 먹을거리도 골라서 먹어야 하고,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이런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율법 앞에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11: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는 사람을 율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율법이 어디서나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거기서 돌아서는 회개는 혁명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적인 예로 수능 제도를 보십시오. 십대 중고등학생들이 모조리 수능에 매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부모까지 계산에 넣으면 어마어마한 인구가 수능으로 울고 웃습니다. 점수에 따라서 대학 입학이 결정됩니다. 수능 1%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대개 의대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경쟁 사회니까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수능 시험 하나로 한 사람의 평생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제도에 숙명적으로 꽉 묶여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거기에서 돌아서는 게 곧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가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런 문제는 우리의 현실에서 해결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대학교 입학을 무조건 제비뽑기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학교 총장의 연봉과 청소부의 연봉을 무조건 똑같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를 혁명적으로 바꿔보겠다고 나선 이들이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노동에서 소외당하는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얼마 가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좋은 이념과 생각만으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방향만은 놓치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더는 인간 품격을 잃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을 점수나 경쟁력만으로 평가하지 말아야겠지요. 연봉 차이도 가능한 한 줄여나가야겠지요. 제가 이렇게 원칙적인 관점에서 말은 하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압니다. 교회 개혁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발생하는 강력한 태풍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으로 작동하는 사회 진화론에 그냥 맡겨둬도 될까요?

 

하늘나라

 

저는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두 번째 핵심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이 온 하늘나라를 경험하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는 과거의 짐에 눌리지 않게 되니까요. 과거의 업적이나 시행착오에 매달리지 않으니까요. 종말론적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영혼의 중심에서 느끼니까 누구를 만나든지, 그가 판사냐 식당 종업원이냐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태양 빛 아래서는 손전등이냐, 촛불이냐, 서치라이트냐가 중요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적나라한 비유를 들면, 벗은 몸으로 사우나탕에 들어가면 국회의원이든 택배 기사든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그 하늘나라가 무엇일까요? 혹은 하늘나라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혹시 단순히 종교적 판타지인가요? 예수의 비유 이야기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13장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24),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1),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44),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45),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은 그물과 같으니”(47) 다른 복음서에도 하늘나라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하늘나라 비유에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늘나라는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됩니다. 민족이나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되거나 노벨상을 타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수능 만점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비유의 소재는 씨와 파종과 발효와 그물입니다. 아침 햇살, 겨울철 밤하늘,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 밥 한 그릇이나 빵이나 커피입니다. 거기서 전율을 느낍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는 젊은 엄마의 일상일지 모릅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저녁 무렵의 하늘을 보거나 숲을 거닐면서 놀라워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경험이 주어집니다. 중요한 점은 이런 일상 경험에는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런 일상에서 거부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둘째, 하늘나라는 일상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44절에서 천국은 밭에 묻힌 보화 같다고 했습니다. 밭에 묻혔기에 그냥은 보이지 않습니다.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비유도 은폐성을 가리킵니다. 사실은 책 읽기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전에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읽으니까 새로운 경험이 주어지는 거 말입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 중에서 저에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당신 설교를 처음 읽거나 들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을 나중에 느낄 때가 많아서 반복해서 읽거나 듣는다고 말입니다. 매일 똑같이 먹는 밥이지만, 어느 순간에 밥 먹는 행위가 기적 같다는 사실이 감동적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일상에 하늘나라가 은폐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평생에 걸쳐서 구도적으로 찾아가는 이들이 바로 영성가들이고 예술가이며 시인이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비밀의 근원이라 할 하나님을 찾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셋째,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일상의 기쁨을 허락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뻤다고(44) 합니다. 기쁨으로 자기 재산을 다 처분하여 그 밭을 손에 넣었습니다.  15장에 나오는 비유 세 가지도 기쁨이 주제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는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열고 기뻐했습니다.( 15:7) 등불을 켜고 어둔 방안을 샅샅이 뒤져서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도 이웃을 불러서 함께 기뻐했습니다.(10) 가출했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게 불평을 쏟아낸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복음서에서 하늘나라는 늘 함께 먹고 마시는 축제로 그려집니다. 기쁨 충만의 일상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가능한가요? 어떻게 가능한가요?

 

수능 점수와 연봉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에서는 일상에 은폐된 하늘나라와 그 기쁨에 집중하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만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는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 통치인 하늘나라에 의존함으로써 교회의 교회다움이 확보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기 어려운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일상은 왜곡되고, 그 왜곡의 결과라 할 신앙생활의 과잉에 휩쓸립니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서 보듯이 아무리 그렇게 노력해도 영혼이 허전하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각종 종교 행위에 더 열중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위선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그들은 영적인 아픔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하늘나라를 실감할 수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늘나라를 향해서 회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요령이나 방법을 제가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이 여러분에게 나침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전 2:2절입니다. (고전 1:18 참조)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런 발언을 들으면 바울이 종교적인 열광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 전통과 그리스와 로마 철학 및 문학에 전문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광범위한 전문 식견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박학다식해도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첨단 인공지능도 다는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별것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궁극적인 진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 영혼의 무게를 두는 사람은 자신이 십자가 죽음과 비슷한 운명에 떨어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잠시 두려워할지는 몰라도 곧 떨치고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로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에 눈을 뜨면 일상에 은폐된 하늘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립니다. 회개가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주어진 일상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삽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여러분 곁에 이미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