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충만한 삶과 예수 (마 5:13-20)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6. 2. 15. 07:05

주현후 5, 2026년 2월 8

 

 

산상수훈

 

 5-7장을 보통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5:1-2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7장이 끝나는 29절까지 이어집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내용이 다른 복음서에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편집 의도는 마 7:28-2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라서 권위가 있었다면 서기관들은 권위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게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시 서기관들이야말로 율법 전문가들이었으니까요. 오늘날의 판사나 검찰처럼 전문 법조인이라 할 수 있고, 교회로 말하면 신학대학교 교수들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만한 스펙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을 빗대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1:46)라는 말도 나돌았겠습니까. 속된 표현으로 나사렛 촌놈에게 무슨 배울 게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마태가 권위 운운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가 볼 때 서기관들의 율법 해석은 문자에 떨어졌다면 예수의 율법 해석은 본질에 방점이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으나 예수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켰는지 아닌지만을 절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했지만, 예수는 율법 정신으로 사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이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고,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이가 예수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예수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급기야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고유한 율법 해석과 그에 따른 행위가 그의 운명까지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예수의 율법 해석을 왜곡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율법을 폐기하자고 말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니골라당이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니골라당이 두 번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을 교회에 발을 못 붙이게 했고( 2:6),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을 묵인했습니다( 2:15). 율법 해체를 주장하는 니골라당은 오늘날의 구원파처럼 순수 영혼 구원에만 몰두하는 집단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여러 이단 중의 하나였습니다.

 

니골라당으로 대표되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철학적인 배경도 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주의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영과 육은 이원적으로 나뉩니다. 영만이 참되고 거룩하고 영원합니다. 육체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세속적이며 무상합니다. 이런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가 영지주의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설명에서 두드러집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육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거룩한 신성과 세속적인 인성이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육체도 실질적인 게 아니라 허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영혼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이런 신앙은 실제 삶에서 두 극단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영혼과 관계없는 세속의 삶과 완전히 단절한 채 순수 영혼에만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는 타락해도 괜찮기에 육체적 즐거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의 스토아 사상에 가까운 전자는 철저한 금욕주의라면, 에피쿠로스 사상에 가까운 후자는 쾌락주의입니다.

 

율법 충만이란?

 

그 어떤 지역의 교회보다 마태가 속한 교회에서 이 문제가 더 큰 현안으로 대두되었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도 쫓겨나는 중입니다. 쫓겨나는 이유는 교회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만약 유대교와의 관계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을 준수하면 됩니다. 마태 공동체는 다른 교회와의 관계도 있었고, 복음 공동체의 본질에서 볼 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 고민이 마 5:17절에 잘 드러났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완전하게 한다는 사실을 마태는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완전하게 한다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πληρσαι로 동사 πληρόω의 부정사입니다. πληρόω 충만하게 채워서 완성한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fulfil이고 독일어로는 erfüllen입니다. 우리말 완전하게 한다.’라는 표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πληρόω의 명사형 단어가 그 유명한 플레로마(πλήρωμα)입니다. 저 문장의 핵심은 이렇게 읽는 게 좋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기한 게 아니라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충만하게 한다는 말은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잠깐 짚은 대로 유대교를 대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형식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의 일점일획에도 빈틈이 없어야만 합니다. 율법 문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인들도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지상명령입니다. 어떤 교단은 성경에 근거해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근거도 성경입니다. 이를 세속적인 개념으로 바꾸면 법 실증주의입니다. 법으로 모든 일을 규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서 교회나 세상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세상이 법으로 잘 돌아가나요? 정치권력이나 경제 권력 앞에서 법은 종종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과 인간 삶은 문자로 된 법으로 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뿌리 깊은 탐욕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재명 정부는 수도권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분명해 보입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를 5월 말까지 끝내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특히 서울 중심의 아파트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는 걸까요? 강남, 서초, 송파 지역의 아파트는 보통이 30억 원이라고 합니다. 단순 계산으로 월 5백만 원을 저금하면 50년 걸리는 액수입니다. 융자를 얻어서라도 그런 아파트를 사야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띄우고, 그런 분위기에서 불안해하는 보통 사람들도 편승하다 보니 과도한 아파트 재테크 현상이 끊이지 않는 거 같습니다. 이걸 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법이 없어서 막지 못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번 정부는 다른 건 못해도 서민들이 아파트 문제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느끼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반명제

 

마태는 율법의 충만’(플레로마)이 무엇인지를 마 5:21절 이하에 나오는 반()명제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똑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비교합니다. 21-26절에는 <십계명> 여섯째 항목인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1989년도에 티브이 미니 시리즈물로 만든 <데칼로그>에는 열 개 주제가 심도 있게 다뤄집니다.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작품입니다. 마태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20:13,  5:17)라는 십계명 내용을 인용한 뒤에, 그것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직접 살인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욕하는 것도 살인 행위와 똑같은 형벌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체로서의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를 엄격한 도덕 교사로 여길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예수는 율법의 본질을 새롭게 해석한 것입니다.

 

다음 구절부터 이어지는 여러 항목도 기본 구도에서는 비슷합니다. <십계명>의 일곱째 항목을 다루는 27-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20:14,  5:18)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실제 간음 행위만이 아니라 음욕을 품은 것 자체가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에 의하면 간음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 글씨>는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혼외정사로 임신한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자는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그녀는 A(Adultery, 간통죄)라는 글씨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비인간적으로 모욕당하는 징벌입니다. 주민들은 그녀를 보고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에 만족해합니다. 호손은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 금욕주의적 도덕주의에 근거한 이상 국가를 세우려던 미국 청교도들이 오히려 비인간적이며, 위선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왔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돌로 칠까요, 하고 묻습니다. 예수의 대답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8:7) 서슬이 퍼렇던 사람들이 모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뒤로도 산상수훈에는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 몹시 불편한 예수의 가르침이 계속 나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는 율법의 가르침이 있지만, 예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의 가르침과 달리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4)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6:3)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됩니까? 기도할 때도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서 두 팔을 하늘로 뻗치고 자랑하듯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남이 안 보게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는 남에게 보이려는 율법적인 삶을 위선이라고 본 것입니다.

 

위선이 왜 나쁜데, 나쁘다고 하더라도 악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일리가 있는 반론입니다. 이걸 속시원하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 초등학생 친구 두 명이 있다고 합시다. 한 아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는 잘난척하면서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고, 땡땡이를 쳤다고 담임 선생에게 고자질했습니다. 누가 더 나쁠까요? 분명한 사실은 고자질한다고 해서 거짓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 준수로 세상이 더 도덕적인 세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얼마나 더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존재로 만드느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마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5:31)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세상이 바로 율법 충만한 세상입니다.

 

오직 은혜!

 

()명제가 가리키는 율법 충만은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설득력이 있을까요? 예수로 인해서 율법이 형식에 머물지 않고 그 본질을 회복했나요?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본질을 제대로 붙들고 살아갑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이 충만해지고 있나요?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나 교양 면에서 더 낫다는 상대적 우월감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삶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다.”라고 큰소리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예수가 율법 충만과 삶의 충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만이 저의 실존을 지탱하는 유일한 근거이자 토대입니다.

 

저의 이런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언지를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예수를 알면 알수록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위선과 교만과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최선이 서기관들이고 바리새인들의 삶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에 저 자신에게 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저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이 저를 정신 차리게 합니다. 자기 절망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는 곧 불안하고 두렵게, 즉 종처럼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거나, 지식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너무 뻔하거나 뻔뻔한 소리로 들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위협과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게 핵심입니다. 예수를 향한 믿음만으로,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해방의 삶을 허락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충만한 삶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충만한 삶에서 예수의 반명제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충만한 삶은 오직 은혜의 깊이에서만 주어집니다. 오직 은혜를 갈망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상대적 우월감으로 자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듯이( 3:16) 다가오는 은혜의 깊이에 몰입합니다. 오늘 예배에 함께하는 여러분의 삶이 은혜의 깊이 안에서 점점 더 충만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