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후 6주(예수 변모 주일), 2026년 2월 15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벌어진 기이한 현상에 관해서 세 공관복음서가 거의 비슷하게 보도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 현상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의 변모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와 엘리야의 현현입니다. 당시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먼저 2절을 읽어 봅시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의 변모 현상에서 핵심 단어는 빛입니다. 그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이 빛이라는 메타포로 표현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아우라’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에서도 빛이 날 때가 있을 겁니다. 연인들은 가끔 상대방을 첫눈에 반하는 경험을 합니다. 상대방을 빛으로 느끼는 겁니다.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강렬한 사람에게서 그런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구약 인물 중에는 본문이 거론한 모세와 엘리야가 대표적입니다.
메타포로서의 빛
1) 출 34:29-35절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이 음각으로 새겨진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자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토라)을 여호와로부터 받은 인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담은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권위는 율법의 권위이고 생명의 권위인 셈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하나님 여호와께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그 모세의 영적 권위가 예수에게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에게서 빛이 발산했다는 말이나 모세가 거기 나타났다는 말이 이를 가리킵니다.
2) 엘리야는 구약 인물 중에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많이 실행한 인물로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미리 올 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생각했습니다. 왕하 2장에 그의 승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가 그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했습니다. 왕하 2:11절이 그 장면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 능력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모세 이야기나 엘리야 이야기 모두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들의 영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영천시립도서관에서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 공저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라는 제목의 책을 빌려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신적인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에 “메타 포이에시스,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이라는 소제목이 나옵니다.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는 어원적으로 ‘포이에시스(창작, 제작)’를 넘어선다(meta)는 뜻인데요. 시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을 통해서 만물의 거룩한 빛을 만난다는 겁니다. <에필로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늙고 지혜로운 스승이 오랫동안 가르친 제자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각자의 길을 가던 두 제자가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났습니다. 첫째 제자는 세상에 빛나는 것보다는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이 더 많다는 걸 보았기에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았다고 토로했습니다. 둘째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더없이 빛나는 것들은 존재하지.” 더없이 빛나는 것들로 인해서 둘째 제자는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더없이 빛나는 존재’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 소소한 일상에서 빛을 경험한다는 게 실제로 무엇인지를, 여러분이 다 알겠지만,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예수 변모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 중의 한 분이 드립백 커피를 저에게 주면서 물 온도계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각각의 드립백에 물 온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93도, 92.5도, 92도 등등입니다. 0.5도나 1도 차이로 커피 맛이 달라진다는 걸 저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로는 완전 다르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맛의 차이를 느낀다는 건 그에게 커피가 빛으로 경험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어느 피아노 선생의 책에서 피아노 88개 건반의 깊이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그분에게는 피아노 건반이 빛으로 경험된다는 뜻입니다. 나락 한 톨이나 야생화 하나를 빛으로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고유한 깊이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 사물의 존재론적 깊이를 느끼는 사람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생명의 힘에 압도당하기에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와 달리 만물을 빛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일상의 권태와 무료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고귀한 시간을 ‘먹방’이나 ‘수다 떨기’ 비슷한 일로 소비합니다.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 편에는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성어가 나옵니다.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이 문혜군(文惠君) 앞에서 소를 잡습니다. 그 솜씨가 신기에 가까워서 춤을 추고 연주하는 거와 같았다고 합니다. 평생 소를 잡았으나 그가 사용한 칼날은 처음 벼린 거와 같았습니다. 힘을 주어 억지로 자르지 않고 살과 뼈와 힘줄 사이의 빈 곳에 칼을 집어넣기에 오히려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겁니다. 장자는 그걸 도(道)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도는 곧 빛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겠습니다. 박준 시인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시집의 ‘시인의 말’을 이렇게 두 행의 시로 적었습니다.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시인이 말하는 빚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빚일까요? 빚이 빛으로 변하는 그 순간을 박준 시인이 경험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괴테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Mehr Licht!”(더 많은 빛을!)라고 말한 것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기이한 변모 현상이 일어난 현장에 있던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가 예수께 묻습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수제자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은(마 16:18-19)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라거나 천국의 열쇠를 손에 든 자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대표자니까 마태 공동체에서 그렇게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종종 그의 실수도 짚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를 뜯어말리다가 ‘사탄아!’라는 책망을(마 16:23) 듣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뜬금없이 예수께 이곳에 초막 세 채를 짓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한 채,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각각 한 채씩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런 경험이 더없이 좋다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황홀한 빛을 경험하는 순간보다 우리 인생에서 더 멋진 순간은 없으니까요. 마치 공주나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이 아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없습니다. 지금은 초막 운운할 때도 아니고,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 순간 어떤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그 장면을 5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세례받던 순간에 하늘로부터 들린 말씀과(마 3:17)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시 89:26-27 참조)라는 말씀이 바로 예수께 실현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마 16:16절에 따르면 베드로의 입에서 이미 그런 신앙고백이 나왔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신약성경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전하려고 기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늘날 예배와 설교 행위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 한 가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반복해서 고백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절실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는데도 그 한 가지 사실이 별로 분명하지 않으니까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이 들어서까지 팽팽하게 붙들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일상 과잉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AI가 광풍처럼 몰아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와 온갖 여흥이 차고 넘칩니다. 가족관계나 친구, 직장 문제도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약간이라고 한눈을 팔다가는 낙오자가 될지 모를 정도로 일상에 관계된 일들이 팽팽 돌아가는 마당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실감이 가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이 질문을 외면하거나 예수 변모 현상 앞에서 초막 세 채를 짓자고 제안한 베드로처럼 핀트가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대충 유지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경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제자들은 하나님께만 가능한 참된 생명을 예수에게서 경험했다는 게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 경험에 대한 교리적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하나님께만 가능한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예수 변모 이야기의 앞과 뒤에 각각 한 번 나옵니다. 앞에 나온 것은 예수의 부활 예고입니다. 마 16:2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본문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파멸하는 죽음이 전제됩니다. 예수는 죽음이 무효가 되게 한 분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세상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의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그 부활 신앙에 근거해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 17:14절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하소연했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삐뚤어진) 세대”라고 일갈하신 후에 아이를 고쳤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예수로 인해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20절에 나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아주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가 볼 때 당시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삶의 능력은 훼손되고 온갖 율법적 무게에 삶이 짓눌렸습니다. 친가와 외가가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는 <선악 저편>과 <도덕 계보학>에서 당시 금욕적이며 도덕주의를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개념으로 분석하면서 노예 도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니체는 당시 도덕주의를 망치로 깨부순 철학자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는 삶을 옥죄는 율법을 깨부순 분이었다고 해도 잘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산이 여기서 저쪽으로 옮겨지거나 옮겨지지 않거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고, 초자연적 기적에 현혹당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제 이익을 위해서 전지구적 기후 위기에 대한 국제적 우려와 조치와 협약을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최종 승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곳곳에 하나님의 빛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믿음의 본질과 그 능력을 제대로 경험했기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유대의 종교적 율법주의와 로마의 정치적 제국주의 앞에서 그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뀐 겁니다. 이런 신앙을 물려받은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자유를 빛처럼 느끼나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변모는 마술이 아닙니다. 생명의 실체이고 구원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변모(변형, 변화)될 것입니다. ‘몸의 부활’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직 두 발을 딛고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게 최선은 구름 속에서 들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에 따라서 예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간질병 같이 발작을 일으키는 세상을, 또는 종종 그런 방식으로 펼쳐지는 개인 인생살이를 돌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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