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2주, 2026년 1월 18일
예수의 세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네 복음서가 똑같이 인정합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기에 굳이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이유는 당시 세례 요한의 영적 카리스마가 강력했다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불을 토하듯이 외치면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도 그런 여러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껄끄러웠습니다. 죄를 씻긴다는 의미의 세례와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요한복음의 독특한 접근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달리(막 1:9 참조)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요 1:31)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공관복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명칭을 예수에게 붙입니다. 요 1: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께서 세례받으러 오는 걸 보고 요한이 다짜고짜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검토된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착상이 본문에 자리를 잡은 겁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라틴어로 ‘Agnus Dei’입니다. 중세기부터 지금까지 미사와 예배 시간에 자주 불리는 찬송가입니다. 우리도 성찬식 중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제목의 찬송가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두 번 부르고 3절에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바흐의 미사곡 B 단조 마지막 부분 참조)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제단에 놓인 희생 제물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그 순전함을 강조하려고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린 양과 그의 피에 무슨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세상과 사람의 죄를 없애는 건 아닙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야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에 이런 종교의식을 행한 겁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일상을 살아간다면 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더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으며, 더는 교만하지 않고 세상일로 절망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한 근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있습니다. 어린 양은 유대의 종교적 차원이고, 십자가 죽음은 로마의 정치적 사건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건입니다. 어떤 철학자나 역사학자도 이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인식과 통찰과 믿음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본 것일까요? 아니면 종교적 망상에 떨어진 것일까요? 당시 그리스도교 주변 세계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로마의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64년에 발생한 로마시 대화재의 방화 책임을 소수자에 불과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일종의 희생양을 찾은 겁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개에게 물려 죽게 하거나 몸에 기름을 발라서 인간 횃불로 사용했습니다. 네로의 이런 희생양 삼기에 로마 시민들이 호응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별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찬식을 인육 행위라고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려고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을 로마인들이 경멸하는 인신 공양으로 오해했습니다. 로마시의 대화재를 종말에 대한 조짐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일부 있었나 봅니다. 그런 말이 와전되어서 그들이 불을 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겁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밉보이는 상황에 놓였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위태롭게 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믿고, 그런 내용으로 찬송을 부르고, 이를 과감하게 세상에 선포했다는 것은, 사도신경에서 빌라도 로마 총독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의 생각이 아주 혁명적이고 도전적이며 더 나아가서 도발적이었다고 말해도 틀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즉 하나님을 로마 제국이 죽였다고 외치는 거니까요. 프리드리히 니체 버전으로 바꾸면 로마 제국이 ‘신을 죽였다.’라는 말이 되니까요.
그렇지만 교회는 로마 제국에 대해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본래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세상을 너무 안일하게 보는 거라고, 그런 식이라면 세상의 악을 어떻게 응징하고 정의를 어떻게 세우느냐고, 악을 방관하다가는 더 큰 불행이 일어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시대에 루터교 본회퍼 목사는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은 인도로 돌진한다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 희생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보다 미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 내리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20세기 순교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반인륜적 나치의 행태 앞에서 본회퍼의 행동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죽인 로마 제국에 테러를 가할만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죄와 악은 강압적인 폭력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21세기에도 여전합니다. 힘과 힘이 부딪칠 뿐입니다. 공산국가인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은 그렇다 치고, 민주주의 국가를 대표한다는 미국의 트럼프가 보이는 행태를 보십시오. 순전히 ‘아메리카 퍼스트’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몰두합니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상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제국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살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찬송했습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어린 양의 운명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실제로 죄와 폭력과 슬픔과 외로움과 온갖 불행을 없앴을까요? 당시 로마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노래를 가소롭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절대 순종, 절대 신뢰
어린 양은 절대 순종과 절대 신뢰를 가리킵니다. 오늘 주보 표지 그림에서 보듯이 결박당한 어린 양에게는 아무런 열정도 없고 의지도 없고 욕망도 없으며, 슬픔도 없고 자기 연민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가장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현대인은 정반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당당하고 씩씩하며 남보란 듯이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허세와 허풍을 보이기도 하고, 없는 거까지 다 끌어내서 힘자랑에 도취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린 양의 저 무저항과 순종과 희생과 겸손과 낮춤과 복종, 그리고 동양 사상으로 말하면 일종의 무위(無爲)와는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마음껏 즐겁게 살아야겠지요. 저는 그렇게 열정적이면서 의욕적으로 살려는 노력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린 양이라는 표상이 자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만 궁극적인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실존에서 말하면, 로마 제국의 거대한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치욕적이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동의가 되나요?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는 모두 어린 양의 운명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강한 짐승인 사자나 호랑이나 코끼리도 결국에는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어린 양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듯이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 모든 욕망이 사라집니다. 야무진 꿈도 없고 미움도 없고 미련도 없습니다. 노벨상의 명예나 대통령이라는 권력도 아무 쓸모 없습니다. 절대복종만 남습니다. 살아있을 때 이런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면 최선의 인생일지 모릅니다. 그게 잘 안 됩니다. 온갖 이해타산과 잡념과 망상에 휘둘립니다. 어린 양의 운명과는 반대의 길로 무조건 달려갑니다. 그렇게 이름도 내고, 나름 만족감도 얻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밀고 나갔다가 결국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고 절망합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 하면서 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평화와 안식을 느끼지 못하고 죽습니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듯이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누군지를 30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난 어떤 현상을 보고 예수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와서 세례를 받는 예수 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다. 33절이 그 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물세례는 행동거지가 새로워지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존재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양심이 살아나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율법이고 성령 세례는 복음입니다. 물세례는 죄를 심판하는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본문 요 1:36절에서 세례 요한은 옆에 있는 예수를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Ecce Agnus Dei)라고 다시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중 하나인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에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요한은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양인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그의 죽음으로 죄가 극복되었다는 게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되나요? 죄를 없애는 신통한 마술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는 건가요?
죄의 세력
죄의 세력은 녹록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그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만, 자기 자랑, 자기 연민, 절망, 우월감, 자기 집중 등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사회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자나 가난한 자, 대법관이나 서울대학교 총장이나 공장 노동자나 전업 주부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 정말 박애와 희생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칭찬받아야 할 정도로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나름으로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시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입니다. 대개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겁니다. 최선은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이웃과 평화롭게 어울려서 사는 겁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문장입니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경험했습니다. 자기의 유일한 아들을 죽음으로 내어준 사건이니까요. 요한복음은 3: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16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경험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이를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억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귀명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소리를 직접 내는 실력이 명창과는 거리가 멀지만 소리를 듣는 데서는 명창 못지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으나 저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어야겠지요. 이왕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인 귀명창까지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에 달렸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이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4: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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