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죄 사함에 관해 (엡 1:3-14)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6. 1. 9. 05:52

성탄 후 2, 2026년 1월 4

 

 

속량과 찬송

 

오늘 설교 본문인 엡 1:3-14절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찬송하게 하신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래서 <루터 번역 성경> 그리스도를 통한 속량 받음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함이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량을 받았다는 데에 있다는 겁니다. 이걸 더 압축하면 속량과 찬송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는 삶의 태도니까 이해하기 어려울 게 없으나 속량은 조금 까다롭습니다. 7절이 그 내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위 구절에 따르면 속량(redemption)은 곧 죄 사함(forgiveness of sin)입니다. 여기서 속량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입니다. 이 단어는  로부터를 뜻하는 πο 몸값을 뜻하는 λύτρον의 합성어입니다. 전쟁 포로나 노예를 제삼자가 거기에 해당한 값을 대신 내주고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대신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짚은 겁니다. 그래서 본문은 속량이 곧 죄 사함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참된 의미에서 속량을 받아 죄가 없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진술이 오늘 우리와 현대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을까요? 단순히 종교적 수사일까요?

 

7절 문장에는 전치사가 세 개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in)이고, 둘째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according)이며, 셋째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through)입니다. 각각 다 중요하기는 하나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이 문장의 골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피는 고대 유대인들의 희생 제사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종종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피는 생명 자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피를 뿌리는 행위는 생명의 주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도 피 뿌림의 의식을 행했다는 말은 그들이 죄의 폭력성과 파괴력을 엄중하게 보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막강한 지배력 밑에 놓인 채 삽니다. 죄의 포로이자 노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노예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은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겁니다. 니체나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노예 심리라고, 그러니까 생명을 억압하는 종교성이라고 주장할 거고요.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 현장에 그런 현상이 없는 건 아닙니다. 심리적 죄책감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옥죄는 일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특히 중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이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생명 지향적입니다. 생명 지향성을 파괴하는 세력이 바로 죄입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나르시시즘 현상들이 그것입니다. 피조물인 자기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심리 작용 가운데서 평생 살다보면 늙어 죽는 순간까지 좁디좁은 자기에게 집착하거나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에게 병적으로 매달립니다. 그 대상이 돈이나 친구나 자식이나 권력, 또는 취미 생활이나 각종 동호회 모임, 나쁜 쪽으로는 술이나 마약입니다. 이 모든 일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를 배제하면 인간의 일상적 삶이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의존적이니까 영혼의 자유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영혼의 자유를 훼손하는 세력이 곧 죄입니다.” 이 문장을 기억하고 이어지는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영혼의 자유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객관적인 수치나 실험실의 실험 결과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운명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유한 인식과 경험을 통해서만 이런 영적 경험이 가능합니다. 예수 제자들에게 그런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이들 중에서 바울의 경험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그는 갈 1:11절 이하에서 자기 경험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εαγγέλιον)은 다른 제자들에게서 받은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특별한 깨달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율법을 넘어서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 2:2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도다.

 

이를 가장 단순하게 바꾸면 삶의 목적이 착하게 사는 것이라면 예수의 피는, 즉 그의 십자가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폐가 있는 듯이 들립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받는 이유는 착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요. 착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살고, ‘럭셔리하게 존경받으면서 사는 거 말고 신앙적으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삶이 뭐라는 거냐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는 곧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피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과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까? 그냥 무덤덤합니까? 십자가 죽음은 예수에게서 일어나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은 선지자는 있으나 십자가 달린 선지자는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변명의 여지 없이 모욕적인 겁니다. 이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모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었던 예수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실망해서 각자 고향으로 흩어졌다는 복음서의 보도는 신빙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으나 이후로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께서 그들에게 살아 있는 자로 경험된 겁니다. 그 과정을 복음서도 그렇고 서신도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들의 부활 경험이 마술사의 눈속임 같은 거였다면 가능한 한 자세하게 묘사했겠지요. 그 사건은 뉴스 보도나 현장 실습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반복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라서 더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그들의 일상 깊은 곳에 들어와서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인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만사를 사실 여부로만 판단하니까요. 정말 중요한 일은 단순한 사실(fact)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 압니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실은 다음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경험을 통해서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자가 흘린 피의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부활 경험을 통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신앙 정체성에 근거해서 나온 겁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니까 죽음이 극복되었다면 당연히 죄도 극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복음은 언제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포로와 노예 신세에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기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고 본문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은 깊은 차원에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계시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에서 찬송하시나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함은 우리가 영혼의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마술적인 효과가 있어서 죄 사함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실제적인 어떤 사태를 가리킵니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죄 사함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죄도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받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는 사실을 믿느냐, 하는 질문을 받는 겁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한 죄 사함은 경험할 수 없고,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와 함께, 그리고 예수 안에서 죽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궁극적인 미래의 생명체가 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이미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이 삶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파렴치하게 살아도 사죄 기도만 하면 용서받으니까 괜찮다는 값싼 은혜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책임감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죄는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을 비인간화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왜곡하는 세력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런 세력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서 무시당합니다. 장애인들은 존엄성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가난한 교회 목사는 노회나 총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많은 이가 불안해합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미루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도 이런 불안 심리의 작용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저항합니다. 책임 윤리를 감당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중요한 것은 반생명적인 현상이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부가 시원치 않아도 괜찮고, 경쟁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엘리트가 되지 못해도 생명 충만을 누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게 바로 죄 사함이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이게 실제로 설득력이 있는 말일까요?

 

다시 예수의 피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한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운명 전체로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나 예레미야, 그리고 모세나 엘리야에 버금가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가 가장 모멸적인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를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죽어도 억울할 게 없습니다.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세상살이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인생을 더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시시하다는 것을 경험했으니까요. 재미가 없으니까요. 마치 어른이 되니까 아이들의 소꿉놀이가 시시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소꿉놀이를 하지 않아도, 아니 하지 않아야만 더 크고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삶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예수의 피에 의한 죄 사함입니다.

 

영혼의 자유

 

이런 신앙의 깊이에 들어갔던 바울은 그의 편지 곳곳에서 구구절절이 놀라운 고백을 이어갑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3:7)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전에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고후 5:17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평생 추구했던 율법을 통한 의로움을 더는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의로움에, 즉 영혼의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저절로 깨달아진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경험이 그걸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진리 순간은 늘 이렇습니다. 진짜 보석을 만나야만 가짜 보석에 한눈을 팔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바울이야 위대한 신학자요 영성가니까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한 우리는 죄 사함과 영혼의 자유라는 경지로 들어가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아직 멀었다는 걸 종종 확인합니다. 여러분도 대충 저와 비슷할 겁니다. 어떤 이들은 죄 사함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소굴로 머리를 디밉니다. 영혼의 자유와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과 영혼의 자유를 일상에서 경험하고 살아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열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공생애 첫 음성으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를 외쳤습니다.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영혼의 울림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죄 사함이 가리키는 영혼의 자유가 실제로 무언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해도 되겠지요. 오늘 주보 표지에 취나물 홀씨가 나옵니다. 지난 화요일에 저의 집 뒤꼍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뒤꼍에는 수많은 보물이 숨어 있어서 그걸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한겨울철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이 취나물 홀씨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을까요? 저 홀씨를 보는 데에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에 대한 강요로부터 죄 사함을 얻는 겁니다. 이런 걸 예로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적은 숫자가 현장과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든베르그 변주곡에 온전히 집중하는 청중들처럼 예배에 집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이 깊은 곳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26년에는 죄 사함의 은혜가 더 깊어져서 저와 여러분의 일상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처음과 끝에서 보았듯이 하나님 찬송으로 충만해졌으면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