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후 1주, 2025년 12월 28일
할렐루야!
시편 148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는 ‘할렐루’(찬양하라)와 ‘야’(야웨)라는 히브리어 합성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두 단어가 나뉘어서 나옵니다. ‘할렐루야’가 변형형으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취할 태도는 바로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눈에 그 엄중한 사태가 들어온 겁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어떨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한 구절씩 천천히 따라갈 생각입니다. 동행합시다.
2-3절에는 하늘에 속한 것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천사, (하늘의) 군대, 해와 달과 별, 하늘의 하늘,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이 그것들입니다. 고대인들이 생각한 하늘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열거되었습니다. 하늘은 생명의 근원 자리한 곳입니다. 거기서 오는 빛과 비가 지구의 생명을 살리니까요. 그래서 고대 문명은 하늘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며 별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은 그것들마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피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5-6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명령한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고 보태거나 빼낼 수 없는 명령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대인들에게 신처럼 받들어지던 하늘의 세력들이 아무리 막강해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보존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노래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깊고 아득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7절에는 용과 바다가 나옵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용과 바다는 악한 세력의 근원으로 표상됩니다. 시인은 그런 악한 세력의 근원까지 찬양할 수밖에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배척하는 영과 바다가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의 영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조금 더 실감 나게 바꾸면, 지옥도 여호와를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아니 찬양해야만 한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 인간의 눈에 시원치 않거나 추악하게 보여도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실존과 연결해서 본다면 우리의 모든 부끄러운 부분도 결국에는 여호와를 찬양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이라는 영성에서 이런 시각이 가능합니다.
8-10절에는 자연 현상과 숲과 짐승이 망라됩니다. 오늘 우리도 일상에서 쉽게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 편의 시처럼 생각하고 다시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 …
시인이 거론하는 이런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현상은 놀랍게도 지구에서만 벌어집니다. 태양을 비롯한 별은 그 자체가 불덩어리이기에 따로 불이라 할 게 없습니다. 행성에서 불이 나타나려면 산소가 충분해야 합니다. 지구에서는 불만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불과 안개와 광풍이 서로 어울려서 나무와 과실수를 살아나게 합니다. 그 사이에서 여러 종류의 동물과 곤충과 박테리아가 살아갑니다. 그 현상 자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는 게 시인의 영적 시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바라봅니다. 자연을 이용해서 돈 버는 것만을 생각하는 겁니다. 땅이 투기의 대상으로 떨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인간 삶의 편리를 위해서 자연을 수탈하는 건지 모릅니다.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어떤 존재론적인 무게가 있는지를 뚫어보지 못합니다. 찬양은 없고 탐욕만 가득한 건 아닐는지요. 찬양의 삶이 실종된 결과는 영혼의 쪼그라듦입니다. 영혼의 궁핍입니다. 그것이 무언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게 더 큰 문제겠지요.
홀로 높으시다!
11절과 12절에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왕과 백성들과 고관들과 재판관들과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찬양하라는 말을 들으면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를 머리에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전문 사역으로 감당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 은혜와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기능이 있기는 하나 옛날 부흥회처럼 너무 인위적이고 감정적인 데 쏠리는 위험성도 없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찬양은 오히려 자기와 자기감정을 억제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우리의 영적 태도입니다. 억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너무 깊고 너무 높으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절대자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13절에서 여호와를 가리켜서 ‘홀로’ 높으시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하게 경험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데에 마음을 쏟는 삶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인격과 지성이 모자라기에 그러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본래 그렇습니다. 고대 제국에서 왕은 자기 이름을 영원히 기리려고 온갖 수단을 다 찾았습니다. 지금도 불가사의에 속하는 피라미드가 대표적인 건축물이겠지요. 만리장성이나 유럽의 여러 고성과 콜로세움 같은 원형 경기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광 차 한 번쯤 다녀볼 만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인간의 자기 숭배에 뿌리를 둔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이런 건축물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졌을지를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다윗 궁과 솔로몬 성전의 위용도 엄청났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치와 종교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자기 숭배는 에덴동산에서 기원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유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라는 뱀의 유혹에 아담과 이브가 빠져들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화적인 글쓰기 방식이라서 뱀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신처럼 되고 싶다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짚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정치나 경제만이 아니라 소소한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병적으로 나타나면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됩니다. 군중들은 그런 독재자에게 자기를 투사시키면서 열광합니다. 일종의 우상숭배 현상입니다.
실낙원 이야기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신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린 셈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건지 모릅니다. 그들이 밝은 눈으로 처음 본 현상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끄러움이 시작했겠지요.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자격을 잃은 겁니다. 그들은 추방당했습니다. 앞으로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그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결국에는 자기를 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나 판타지가 원형적 기쁨과 평화의 삶을 파손한 겁니다.
21세기의 선악과는 인공지능 기술이 아닐는지요. 인공지능의 발전이 어디까지 이를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 메커니즘을 흉내 내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사람보다 더 깊고 넓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듭니다. 목사의 설교문도 맞춤형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기술도 찾아내서 무병장수의 길을 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동을 휴머노이드 인공지능이 해결하고 인간은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멋진 세상이 실제로 오는 걸까요?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받는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과 기술의 절대화는 오히려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영혼이 궁핍해질 수 있습니다. 선악과 설화에서 보듯이 인공지능의 미래는 결국 실낙원이라고 말입니다. 저의 이런 말에 근거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들을 때 공연한 트집잡기나 헛소리일까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옛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나 친구들은 손 글씨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보통 우편은 일주일 걸렸습니다. 답장을 기다리던 간절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카톡이나 메일이나 전화로 즉시 소식을 전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겁니다. 시간이 단축되었다면 사랑이 훨씬 더 풍성해야만 합니다. 더 행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경제 논리나 수학 공식이 개입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을 생명 충만으로 바꿔 보십시오. 혹은 기쁨 충만, 평화 충만이라고 해도 됩니다. 인간 문명과 기술과 정보와 지식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자연과학과 기술문명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세상이 오면 인간은 점점 더 생명의 본질로부터 소외당할지 모릅니다.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는 고향을 잃은(실낙원) 사람처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해도 영혼의 만족이 없습니다. 어딘가 공중에 떠서 부유하는 듯이 삽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일로 스트레스에 압도당합니다. 걱정과 염려를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런 상황을 모면하려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기에게 더 집중합니다. 놀음판에 들어가면 돈 내고 돈 따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말입니다. 자기를 높여봤자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끼기는 하나, 그래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혼의 평화와 기쁨이 있는 다른 세계를 맛보지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할렐루야를 반복해서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생명의 길
하나님이 ‘홀로’ 높으시다는 말은 그분이 세상과 만물을 지으셨고, 지금도 확실하게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반문할 겁니다. 이 문제로 그들과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다툰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선악과 이후 밝아진 인간 이성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오감과 이성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똑바로 보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임마누엘 칸트는 이를 반대합니다. 사람은 세상의 객관적인 실체를 완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만 봅니다. 소리도 일정 주파수 이상은 듣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리 자체를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색깔도 파장에 따라서 구별됩니다. 우리가 보는 빨간색이 실제로는 빨간색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박쥐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합니다. 칸트의 말을 따르면 사람은 물 자체(Ding an sich)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증명하거나, 거꾸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각자가 선택할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성경의 전통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를 따르기로 나선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선택한다거나 따른다는 말을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할 거냐, 말 거냐, 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어느 정당을 지지할 거냐, 대도시에서 살 거냐 시골에서 살 거냐, 하는 정도의 선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겁니다.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앞에서의 선택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5)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시편 기자는 주 하나님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독특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
뿔을 높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승리를 안겨준다고 할 수도 있고, 위상을 높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로 바꾸면 그분은 “아빠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주 하나님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사실을 중심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 당연히 뿔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11절에서 거론된 왕과 고관과 재판관에게 종속되지 않는 삶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눈치를 안 보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생생하게 경험하십니까? 그게 실감 나기도 하나 뒷전으로 밀리기도 할 겁니다. 그 문제를 제가 해결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삶의 경지를 개척하는 일은 상당할 정도의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영혼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간다면, 그래서 제대로 믿는다면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조금씩이라도 벗어나는 걸 느낄 것입니다.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겁니다. 이 영혼의 자유가 주 하나님만이 ‘홀로’ 높으시다는 시편의 찬양이 말하려는 본래 의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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