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2. 10. 05:30

 대림절 2, 2025년 12월 7

 

 

로마 교회의 문제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할 때 로마 교회에 가보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여러 통로로 로마 교회에 관한 소식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앞으로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이어서 스페인까지 갈 계획이었습니다. 직접 대면하기 전에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인 복음의 본질을 그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으나 핵심 내용으로만 보면 15장으로 끝나는데, 그 마지막 단락에 해당하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바울은 희망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4절을 들어보십시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의 인내와 성경의 위로와 희망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가르침처럼 들리기는 하나 실제로는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14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교회 공동체를 허물 수 있을 정도로 교인들 사이에 반목이 심했습니다.  14: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라니, 아주 서늘하게 들리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늘 제한적이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옳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받습니다. 바울이 이런 충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기원후 49년에 글라디우스 로마 황제는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립니다. 당시 로마에는 백만 명 인구 중에 유대인들이 5%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몇몇 회당도 있었고요. 추방당한 이들 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18:2)도 있었습니다.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54년 네로 황제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로마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처음 로마에 복음을 전했던 유대 그리스도인은 소수파가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율법을 기준으로 살았던 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유대 전통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절기를 지켰고, 음식도 가려서 먹었습니다. 아직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절기와 음식을 가리지 않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겁니다.

 

이런 갈등은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전 8장에 그리스도인이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나옵니다. 당시 고기는 그리스 신전에 바쳐졌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 앞에 놓였던 것이라고 해서 먹지 않고,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8:13절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으로 형제와 자매의 양심을 불편하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14:20절에서도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라고 충고하면서, 21절에서 형제가 불편하게 여기면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게 좋다고 덧붙였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기계인 로봇과 인간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적이고 착한 사람들도 하나가 되기는 힘듭니다. 서로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서로를 비판하고 무시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이를 매일 확인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는 독재입니다. 해결 방법이 있나요? 완전한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찾은 최선의 제도는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이겠지요.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만이라도 차이와 다양성, 그리고 비난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식으로 교회가 세상의 모범이 된다면, 그것 또한 간접 선교로서 바람직하겠지요.

 

바울은 위에서 읽은 롬 15:4절에서 인내와 위로를 언급합니다. 서로 생각이 달라서 불편해진 관계를 인내할 줄 알아야만 서로를 향한 비난을 멈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냥 인내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위로받으면 보기 싫은 사람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위로를 받으면 내면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뜻입니다. 어른은 아이들처럼 시시한 일로 싸우지 않습니다. 가끔 층간 소음으로 싸우기도 하고, 심할 때는 상해나 살해를 저지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정서와 심리가 미성숙해서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행태입니다. 너무 뻔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내면이 충만해집니다. 바울은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그의 내면이 희망의 영으로 가득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희망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교회 안이나 밖에서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경험입니다.

 

희망의 하나님

 

본문이 말하는 희망이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도 희망을 자주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온갖 재앙과 불행 가운데서도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으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버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는 칸트 철학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명제 중의 하나입니다. 에른트스 블로흐(E. Bloch) 3권으로 된 방대한 저작 <Das Prinzip der Hoffnung>(희망의 원리)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나 주관적 기대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근본적인 동력입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너의 장래 희망이 뭐니?” 하고 종종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내면을 충만하게 하는 희망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믿음과 단단히 연결된 개념입니다.  11:1a은 이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여기서 바라는 것들은 성경 원어로 희망하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실상(ὑπόστασις)은 실체, 본질, 내용 등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희망의 실체라는 말은 곧 희망 없이 믿음 없고, 믿음 없이 희망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희망이고, 희망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의 사람이 되고, 희망의 사람은 곧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롬 15:13절에서 과감하게 희망의 하나님(Θες τς λπίδος, God of hop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루터 성경을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해서 읽겠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하나님께서 믿음 가운데서 모든 기쁨(Freude)과 평화(Frieden)를 여러분에게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Hoffnung)을 충만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말하려는 핵심은 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미래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종말론적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미래에 속합니다.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을 쓴 몰트만은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은 선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무너진 그 한계 상황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희망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희망이 이전투구식으로 전개되는 현대인의 일상에서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당장 먹고사는 일에 쫓기니까 종말론적 희망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 그런가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실감이 날 겁니다. 제가 삼십 년 전 마흔 초반의 나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십시오. 당시 저는 현풍에서 개척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삼십 년 후의 지금을 당시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시에 삼십 년 후를 또렷하게 마음에 담았다면 훨씬 더 풍성하게 살았을 겁니다. 작은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았을 거고요. 자연과 더 친밀하게 지내고, 사람들을 더 품고 사랑했을 겁니다. 지금 저는 20년 후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살아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85세라고 하니까요. 어쨌든지 20년 후는 분명히 옵니다. 그 미래가 바로 오늘의 저를 끌어가는 생명의 힘입니다. 이게 명백해지면 현재의 삶에 매달리지 않게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서의 인생만이 아니라 세상의 궁극적인 미래인 종말을 영혼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미래가 내일일지, 10년 후일지, 10억 년 후일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자연과학에 따르더라도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했으니까 언젠가는 지금의 우주가 끝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이 세상과 우주가 무한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불교는 그런 생각이 강합니다. ‘자연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하고, 불교의 윤회도 영원한 회귀라는 시간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미래가 어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에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옳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종말론적인 희망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희망을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충만하게 채워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했습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호소입니다.

 

종말론적 희망

 

지금 바울이 가리키는 종말론적인 희망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 희망은 오늘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 변혁하고 이끌어가는 거룩한 힘입니다. 이런 힘에 끌림을 받는 사람의 일상은 궁극적인 희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비유적으로 베토벤이 귀가 안 들리는 그런 순간에도 <합창 교향곡>이라는 표제가 달린 9번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음악이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종말론적인 희망을 볼 수 있는 안목과 느낄 수 있는 영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설교하는 저 역시 그런 경지에 들어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게 어떤 건지만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제가 제대로 길을 가는지는 마지막 심판 자리에서 그분께서 판단해 주시겠지요. 그분의 판단과 사랑에서 배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를 매 순간 드립니다. 평생 신학자와 목사로 살았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게 여러분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주 뜨거운 하나님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든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깊어질수록 그 하나님을 모르겠다.’라는 느낌도 강해집니다. 무한자 앞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두려운 사태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비행하는 듯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조금이라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데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제가 이해한 13절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희망의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화를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궁극적인 희망의 영성은 우선 기쁨과 평화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꽃이 처음부터 꽃으로 있는 게 아니라 씨앗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믿음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에는 기쁨과 평화가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롭게 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가난하거나 외로워도 세상 눈치 안 보고 품위 있게 살아가도록 허락받은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없는 복된 선물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삶을 기뻐할 수밖에요. 이런 기쁨을 알 때만 우리의 영혼은 평화로워집니다. 더는 이해타산으로 작동하는 세상의 일로 다툴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런 설명이 너무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현실에서는 그런 기쁨과 평화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지,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를 알면서도 기쁨과 평화 운운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현실을 저도 알고 있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현실론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지요.

 

바울은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기쁨과 평화가 충만해질 때 종말론적인 희망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운다고 본 겁니다. 당연합니다. 기쁨과 평화를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 이루실 생명의 완성을 희망하게 됩니다. 씨앗의 은폐된 깊이를 아는 사람은 그 씨앗에서 꽃을 미리 상상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 상상은 단순히 상상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삶을 견인하는 실체(휘포스타시스)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희망의 실체, 즉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분들은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희망은 영생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영생은 무조건 영원하게 이어지는 생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이 생각하는 영생과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영생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상은 자연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생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 사람은 죽는 순간에 하나님 안에서 영생의 복을 누린다는 희망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런 죽음보다 더 복된 죽음이 어디 있을까요?

 

저는 죽는 순간에 영생을 희망하는 사람이 되자는 뜻으로만 설교한 게 아닙니다. 그런 영적 깊이가 있어야만 오늘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교만과 업신여김과 자기중심적인 유치한 어린아이 행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는 여러분에게 희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화와 종말론적 희망을 넘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