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깨어 있음”에 관해(마 24:36-44)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2. 5. 06:08

대림절 1, 2025년 11월 30

 

 

제가 신학대학 학부생일 때 채플 강사로 오신 미국 선교사에게서 들었던 아주 흔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게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급하게 뛰어가는 학생을 멈춰 세운 교수가 물었습니다. 자네 그리 급하게 어디를 가나? 강의 들으러 갑니다. 강의는 왜 들으려고 하나? 학점을 잘 받으려고요. 높은 학점을 받는 목적은 뭔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싶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뭐 하려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고요. 그런 다음에는? 늙어가겠지요. 늙은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자네는 결국 늙어 죽으려고 뛰어가는 거군. 말꼬리 잡기 식으로 들리기는 하나 크게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아무리 화려해도 곧 끝난다는 게 분명하니까요.

 

마지막은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해당합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에서 영원히 존속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대략 5억 년 전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캄브리아기 이후 지금까지 지구에는 여러 생명체가 나타났다가 멸종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공룡이 지구를 지배한 적도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와 친척뻘 되는 여러 호모 종들도 모두 멸종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 하이델베르크인, 북경인, 직립인(호모 에렉투스) 등등이 그들입니다. 지금 우리 호모사피엔스도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급격한 기후 변화와 인공지능이 멸종의 원인이 될지 모릅니다. 생존의 위기를 자연 과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좋겠으나 아무도 그걸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최고 여객선 타이태닉호가 유빙과의 충돌로 침몰할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더구나 45억 살인 지구라는 행성이 언젠가는 태양과 함께 우주 먼지로 사라진다는 사실도 명백하니까요.

 

그 날과 그 때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4:36-44절은 그 마지막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처럼 우주 천문학과 생물학을 깊이 알지는 못했으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과 역사에 관해서는 그 중심을 뚫어보셨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마지막 날에 대한 36-37절 말씀을 먼저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여기서 그 날과 그 때는 고대 유대인들이 생각한 세상 마지막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인자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자는 어색한 한자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 Θεοῦ)이라는 예쁜 우리말이 있듯이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라는 헬라어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편의상 그냥 인자라고 부르겠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본래 구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족입니다. 인자도 메시아와 비슷한 뜻이긴 하나 세상을 심판한다는 묵시 사상이 강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 자신도 모른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당시에 그 날과 그 때를 안다고, 그러니까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메시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무력 투쟁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식민 통치를 끝장내야 한다고 유대인의 애국심에 호소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와 분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고, 종교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참된 종교 경험은 불안과 분노와 적대감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과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말입니다.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의 말씀이 우리를 막연한 불안감에 빠지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평화 안으로 이끌어 들인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모른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완성할 종말은 우리에게 감춰졌다는 거 아닙니까. 비밀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표상으로도 생명이 완성되는 마지막을 구체화할 수 없습니다.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모두가 벼락부자처럼 사는 세상이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한다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노동을 전쟁 포로인 노예들에게 맡기고 매일 연회를 즐기던 로마의 귀족들처럼 저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인공지능 기술자들이 꿈꾸는 인류 미래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인간 노동이 휴머노이드 로봇에 의해서 대체되고 인간은 공주처럼 편히 먹고 즐기는 세상이 얼마나 지루할지 상상이 갑니다. 인자가 언제 올지,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계산할 수 없고 표상할 수 없다는 이 말씀에서 저는 오히려 위로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지, 하고 지금 여기서 무사안일하게 산다는 게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일상에서 깨어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오늘 본문에 따르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그 마지막 순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가 먼저 거론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홍수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머리 나쁘거나 불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상을 그저 고정된 눈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40절과 41절에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선택되었고, 다른 한 여자는 버림받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 이야기를 바꾸면 이런 정도가 되겠지요.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괜찮은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중산층 시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어떤 일을 계기로 일상이 보석처럼 빛나는 경험 안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성경 표현으로는 그가 천사를 보거나 은총의 빛에 휩싸이는 겁니다. 다른 친구는 이런 경험이 무언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냥 연봉과 건강과 취미활동에만 마음을 붙였습니다. 이게 곧 데려감과 버려둠이라는 성경 표현이 가리키는 실체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차이라는 게 별것 없네,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연봉이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 삶을 실제로 풍성하게 해주는 조건이 연봉이나 그와 연관된 것만일까요? 이런 주제로 논쟁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세상을 시적으로, 예술적으로,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는 별것 없다는 그들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재미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가난 자체를 예찬하거나 연봉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함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는 영혼의 깨어 있음이야말로 삶을 실제로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대개 영혼의 호흡이라 할 기도와 연관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26:41)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4: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이런 가르침이 자칫 종교 타성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을 실제로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데려감을 받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결정적인 어떤 사태를 가리킵니다. 일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경험되는 겁니다. 마치 흑백 티브이를 보다가 갑자기 컬러 티브이를 보는 거와 비슷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깨어 있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일상을 새롭게 경험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제가 아는 한에서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먼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앞의 몇 행만 읽겠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에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를 포함한 전체 운명에 얽힌 사건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영혼이 풍성해지겠지요. 그리고 사람을 수단으로 다루지 않겠지요. 곽재구 시인은 수국이라는 시 마지막 두 행에서 열일곱 우리 엄마/ 수국에 입 맞추네라고 상상했습니다. 동화 작가 권정생의 눈에는 강아지똥도 보석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일상을 새롭게 빛으로 경험합니다. 생명 충만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들은 일상에 은폐된 생명의 깊이를 찾으려고 보물찾기하듯이 애씁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이런 경험의 절정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하신 분이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자 인자였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 날과 그 때는 곧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 때에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 있게 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재미있거나 힘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42)라는 말씀을 졸린 눈으로 대하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의 위기에 떨어진 겁니다. 신앙의 위기에 떨어졌다는 건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은 생명의 신비와 경이를 맛보지만, 그 사람은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파루시아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오늘 우리처럼 그런 신앙의 위기에 종종 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기원후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서 무너졌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감감무소식입니다.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내몰린 당혹스러운 상황입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겁니다. 이런 신앙의 위기 앞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그 날과 그 때가 도둑 들 듯이 닥칠 것이니까 깨어 있으라.”라는 예수 말씀이 바로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예수 재림은 언젠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와 단단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게 중요합니다.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사건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미래와 현재는 하나입니다. 연대기적인 시간(크로노스) 범주에 갇혀 있으면, 즉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만 생각하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간을(카이로스)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기도 합니다. 비유적으로 임윤찬 피아니스트를 생각해 보세요. 2022년도에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나이로 우승한 이후 현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우승하기 전에 이미 피아노 음악의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미래의 우승이 그의 피아노 연습 과정에 이미 선취(先取)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재림이라는 미래를 현재로 당겨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몸부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요. 그런 사람은 당연히 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이미 얻은 사람처럼,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니까요. 평화와 기쁨과 해방을 삶의 내용으로 채워가려고 최선을 다하니까요.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처녀들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25:1-13)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깨어 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루틴으로 수행할 수는 있습니다. 미적 감수성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 정도만 해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생명을 얻는 일은 그런 정도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동양식으로는 백척간두에 서는 일이며, 서양 실존주의 철학으로는 단독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4:26은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중요한 것을 버리고 관계를 끊어내는 삶은 아주 불편한 일입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등등, 더 나아가서 직장 동료와 사업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게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일상에 성실하지 않아도 좋다거나 무조건 외톨이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집중할 때만 우리의 삶이 실제로 풍성해진다는 뜻입니다. 다행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절대적인 것을 나눠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사람끼리는 사이좋게 지내거나 도반으로 지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에, 즉 그분의 파루시아에 영적 촉수를 예민하게 작동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궁극의 깊이에서 그분은 이미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이 대목을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한 구절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게 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우듬지에 걸린 별이나 달, 나뭇잎 떨어지는 풍경이나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와 겨울바람 소리가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경험될지 모릅니다.